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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신비롭고 순진한 여인에 대한 남자의 환상.
욕심 없이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성공한 사내의 그리움.
문학 내지 예술을 향한 자본과 현실의 끊임없는 구애.
책을 읽고나서 위의 세 문장으로 감상평을 요약해 보았다. 어쩌면 한 때 내가 꿈꾸던 연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었다. 한 남자가 내게 반한다, 나는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고 하루 종일 읽고 쓴다, 남자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불가해한 면 때문에 나에 대한 그의 환상은 지속된다, 그는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에 비껴서서 색다른 설렘과 열정을 낳는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지만 사랑의 대가를 사랑으로 돌려주지는 않는다, 단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어느만치 사실이지 않은가. 스무 살 무렵의 나는 한 때 유행했던 전투적 페미니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마치 소설 속 이진처럼, 늙지 않는 소녀같고, 잡을 수 없는 요정같고, 불가해한 귀신같고, 마음 없는 식물같은 여성이 결국 남성을 지배하리라 믿었다. 이진은 가출하지도 않고 가출에의 욕구도 없다. 이현과의 공간에서도 자기만의 자리를 마련할 줄 알고 방해받지 않은 채로 일과 고독에 침잠할 줄 안다. 내편에서 바라본 그녀는 위대한 페미니스트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미덕은 술술 읽히는 맛이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란 점이었다. 분량이 적지 않은 장편인데도 책을 받자마자 거의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사이사이 이진의 기록, 이라는 챕터로 구분되어 있는 단편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문체는 힘들이지 않은 듯 하면서도 유려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진 무력한 인간군상들에 대한 작가의 따듯한 시선 또한 좋았다. 김수현이 쓴 드라마를 보면 끝까지 비난할만한 악인이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 두가지의 인간적 결점으로 인해, 혹은 스스로의 선에서 뒤바꾸기엔 힘겹고 벅찬 운명 때문에 회의하고 방황하다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해가는 모습들을 애정어린 묘사로 잔잔히 그려내고 있었다. 작가로서 문재와 상상력은 꼭 필수적인 항목이겠지만 결국 소설이 사람 사는 이야기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작가 심윤경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란 미덕은 참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상평 하나 더 보탠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희극과 촌극의 시대가 뜨겁게 허물어져가는 비극의 시대에 보내는 동경의 메시지.
그리고 이 리뷰를 쓰면서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수와진이라는 착하게 생긴 형제 듀엣이 불렀던 노래, 파초. 이진의 죽음을 떠올리다가 이 노래의 노랫말이 생각나서 적어본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은 파초같은 여자였다.
정열과 욕망 속에 지쳐버린 나그네야.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가슴으로 노래하는 파초의 뜻을 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