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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멜랑콜리 ㅣ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19년 5월
평점 :
본문만 520쪽의 장편소설. 헝가리의 한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트로이 목마 사건. 이렇게 간단하게 적어놓으니 만만하게 생각하실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마음으로 책을 넘기면 곧바로 코피 터진다. 첫 문장을 옮겨볼까?
“티서강 제방에서부터 저 멀리 카르파티아산맥 발치까지 뻗어 있는, 남쪽 저지대의 얼음에 뒤덮인 단지들을 연결하는 여객 열차는 불행하게 제 발부리에 자꾸 걸리는 철도원의 애매한 해명이나 불안스레 기차역에서 가다 서다 허둥거리는 역장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올 생각을 안했기에(‘그것 참, 연기처럼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나…….’ 철도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 이런 ‘비상’용으로 건사하고 있던, 오로지 두 대로 이뤄진 나무의자 객차를, 한물가고 영 시답잖은, 진짜 마지막 방책으로만 사용되는 424 기관차와 맞걸어 운행에 들어갔다.” (11쪽)
이렇게 시작되는 1부 ‘도입:이례적인 상황들’은 107쪽에 가서 끝나는데, 도입부 본문 97쪽이 딱 두 문단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긴 문단으로 된 장편소설은 본문 490쪽이 단 두 문단으로 되어 있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 이후 처음 읽었다. 베른하르트의 <소멸>은 우리가 늘 읽는 보통의 문장들로 되어 있는 반면, 변두리 유럽의 작가라 이름을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쓴 <저항의 멜랑콜리>의 문장은 길고 길다. 이렇게 긴 문장 안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쉼표 뒤엔, 예의 상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정말로 한 번 쉬고 읽지 않으면 문장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나도 책 좀 읽는다, 라고 자만하며 사는 인간 종족 가운데 한 명이긴 하다. 그런데도, 읽다가 무려 첫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 같은 문장을 서너 번 읽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중간쯤에선 읽고 있는 문장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습관적으로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는 일도 많이 발생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 크러스너호르커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 또는 의미의 20퍼센트나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읽는 독자도 그랬거늘, 원작을 한글로 고쳐 쓴 역자는 어땠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다. 어순이 다른 언어로 만든 긴 문장과 그 속의 쉼표의 순서 같은 건 어떻게 처리했을까. 독자는 이런 거에 신경 쓰지 않을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다시 위에서 인용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한겨울이라 얼음에 덮인 도시(團地)들을 연결해주는 열차가 무한정 연착이 되는 걸 보다 못한 역장이, 기어이 나무의자 객차 두 량으로 구성한 비상열차를 하나 배정해 운행을 하기로 결정해, 친척을 만나러 왔던 교양 있는 중산층 플라우프 부인을, 앞으로 사건이 벌어질 소도시로 이동시킨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임시 열차 안에서 마늘 소시지와 싸구려 담배와 독한 과일 브랜디 팔린카를 마시고 신트림을 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객실에서 가난하고 무식하고 염치없는 하층민들과 섞여 고생스러운 여행을 마친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안락하고 잘 꾸며놓고 먼지 하나 없어 음식물이 바닥에 떨어져도 그냥 집어 먹으면 될 것 같은 청결한 나의 집. 남편이 두 번 죽어 이젠 슬하에 먼저 남편이 낳은 아들 ‘벌루시커’ 하나만 남아 있는데, 알코올 중독 수준의 술주정뱅이라 집안에서 내쫓아버리고 지금은 혼자 산다. 아들 벌루시커는 지역 우체국에서 신문배달을 해 근근이 먹고 살며 은퇴한 지휘자 에스테르 선생의 수발을 들어주고 있다.
1부 ‘도입’ 두 번째 문단의 주인공은 에스테르 선생이 몇 십 년을 참고 살다가 은퇴와 더불어 졸혼을 선언하는 바람에 집에서 내쫓긴 에스테르 여사. 벌써 쉰 살이 넘었으나 큰 키에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소도시의 경찰서장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놀랍게도 아직도 하루에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할 수 있는 신기의 테크닉을 보유한 여인.
그런데, 앞으로 소설을 만들어나가는 요소를 소개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도입’에서 이 여성들이 앞으로도 주연급으로 등장은 하겠지만, 뭐 중요한 조연급일 수도 있고 하여튼, ‘도입’이라는 면에서 나이든 여인들 보다는, 기상관측 이래 이례적으로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이번 겨울에 수십 년간 멈추었던 교회 시계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고, 유랑 서커스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고래를 보여주겠다면서 고래를 거대한 차량에 싣고 도시에 들어오는 일이다. 실제로 가장 큰 고래라고 하는 수염고래는 길이가 30미터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거대한 수중동물을 어떻게 내륙지방까지 운송할 수 있는지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책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초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그럼 인간을 포함한 특이한 생명체를 구경거리로 돈을 벌던 시기는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터무니없이 고래라니. 안 돌던 시계가 갑자기 돌기 시작하는 찰나에. 이건 혹시 작품을 쓰던 1989년, 소비에트가 서서히 무너지던 동구권에 갑자기 쳐들어온 시대의 전기, 트로이 목마 아냐? 실제로 이 서커스단을 책 속에서 트로이 목마에 딱 한 번 비유한다. 그런데 또 문득 든 생각이, 책을 간행한 해가 1989년이면 정말로 책을 쓴 시기는 아직 냉전시기의 헝가리였을 터. 그럼 가장 큰 고래를 광고하며 도시에 들어온 서커스단은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작가가 카프카다. 측량기사 혹은 은행원 K에게 닥치는 운명 또는 필연을 만드는 체제. 그런 체제가 사회와 시민을 질식시키는 기압골 같은 것. 작은 도시가 고래와 서커스 열풍 속에서 갑자기 폭동이 벌어지고 이어서 군대가 진입해 새로운 질서를 잡는 모습을 읽으며 카프카를 떠올리면 안 될까? 본문에 들어가 첫 문단이 나오면 주인공이 은퇴한 음악가 에스테르 씨가 되는데, 그가 자신을 챙겨주는 벌루시커에 연관해 “‘타고난 성향으로 뭉친’ 지역사회는 벌루시커를 단순한 백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그로서는(그도 이런 면모를 벌루시커가 개인적인 끼니와 전반적인 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자신의 투명한 은하계의 고속도로를 거니는, 딱 봐도 제정신 아닌 이 방랑자가, 타락이라고는 모르고, 쑥스럽긴 해도 보편적인 영혼의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어, 실로 ‘현 시대를 상당히 갉아먹고 있는 퇴폐의 힘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의심하지 않았다.”(179쪽)고 여기기는 하지만, (이거 스포일러 아닌가 몰라?) 거의 유로지뷔 수준인 벌루시커가 기어이 불행한 결말에 빠지고야 마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다는 말씀.
하여간 헝가리의 이름 없는 작은 도시는 군대가 진주해, “그들이 처박힌 착각의 냄새나는 진구렁에서 끌어내 법, 질서, 명확한 사고의 고귀한 대의명분 속에서 어느 정도 현실감각을 도로 함양”시키며(478쪽), 현재해 있던 구식 고귀함을 장사지내는 것으로 마감한다. 법과 질서, 명확한 사고를 요구하는 군대라니.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책을 읽고 그 속에 든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아니, 이해하고, 말고 전부 독자의 몫이다. 고백했거니와 나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비의를 거의 눈치 채지 못한 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가. 나는 내 식으로 <저항의 멜랑콜리>를 읽었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