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줄리언 반스. 이번엔 난데없이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변주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일. 더구나 이번엔 주인공이 소비에트 연방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 음악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이라면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 거기에 더해서, 반스의 어려운 결과물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역시 다른 소설을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반스가 영국인으로 영어로 글을 썼으니 무엇보다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며, 주인공이 대단한 작곡가이니만큼 음악에 관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겠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러시아 사람이니 또한 러시아 문학도 웬만한 조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 독자의 100자 평을 보면 마치 이 책을 번역한 송은주 성토장 비슷한 모습인데,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 조건이 영어, (서양고전)음악,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와 문학에 대한 이해, 이렇게 세 가지를 겸비해서 번역하기 어려울 거 같으면, 역자가 알아서 해당 분야 전문가 또는 역자 주의의 잘 아는 아마추어에게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의뢰했어야 한다. 그 과정이 빠져 독자가 읽기에 불편했다면 역자로서 도리 또는 직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나?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번역문 자체에서 껄끄러움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 그렇겠지.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오역 자체는 모르겠다. 오역 여부를 검토할 정도면 원서를 읽지 번역서를 선택했겠는가. 다만 음악과, 러시아 문화 같은 거 나오면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볼쇼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삿코>와 <이고르 왕자>에 열광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스탈린이 이 갈채를 받는 새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듣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33쪽)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품 <사드코>를 스탈린이 좋아했었나본데, <이고르 왕자>는 영어로 <Prince Igor> 즉 <이고르 공公> 일찍이 타타르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러시아의 (왕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 일반적으로 ‘대공’ 또는 ‘공’을 영어로 prince라고 하는 걸 오해했음이 분명하다)영웅을 그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작품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도 혹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는지 열라 검색해봤는데, 없다. 그러니 분명 보로딘의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것으로 잘못 알거나, 잘못 쓴 거다. 이거 말고도 다른 음악적 작은 오류들을, 안타깝게도 역자가 열심히 퇴고를 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오류를 역자가 그대로 옮긴 것인지는 당연히 확인한 바 없다)
 또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그(쇼스타코비치)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과 난해함은 ‘유로디비’적 태도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유로디비란 러시아어로 마을의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바보인 척하지만 실은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겨 쓰던 사람을 의미한다.” (267~268쪽)

 

 러시아 언어는 발음할 때 구개음화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언어로 ‘유로디비’는 ‘유로지비’ 혹은 ‘유로지뷔’, ‘유로지브이’ 등과 비슷하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 공작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세째 아들 알렉세이를 유로지비로 말하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덜' 유로지비 급이다. 이들보다 더 선량한, 심지어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는 것으로 오히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가 비슷한 듯.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백치'나 심지어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 등, 바보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바보에 가까우며,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칭한다.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이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보인다고? 처음 듣는 말이다. 송은주가 ‘옮긴이의 말’을 쓰면서 좀 수상한 곳에서 정보를 가져온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 말고도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의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의 친구 딕 씨氏 같은 인물도 유로지비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책이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소설인지, 책표지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전적으로 줄리언 반스, 이름 하나 보고 고른 책이란 뜻. 쇼스타코비치 이야기였다면 훨씬 전에 읽었을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 가운데 그의 빛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기점으로 인생의 거대한 굴곡에 닥치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욱 그러하다. <므첸스크....>가 어떤 작품인지 모르는 분들은 절대로 이런 흥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오페라 가운데 (책 속에서도 중요하게 거론하는)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불의 천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쇼킹 그 자체인 오페라. 인간본성의 필터 없는 분출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드라마다. “세료자, 키스해줘. 내 입술이 터져 피가 성모상까지 튈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다. 책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문장들도 그리 많았는데 그것들을 어찌 다 옮기나. 몇 개 적었다가 그만 뒀다. 그래도 하나만 옮겨보자.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러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에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쇼스타코비치)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190~191쪽)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건, 새로운 독재자가 나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는 뜻이라고 숱한 사람들이 증언했다. 그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민의 것? 웃기는 소리. 예술은 예술을 경험하고는 그걸 좋다, 라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 아무한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느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다가온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행위는 그걸 창조해내고, 창조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여된 놀이이며 쾌락이다. 예술을 인민을 위한 기재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체제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생을 그만둘 적당한 시기를 놓친 쇼스타코비치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르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248쪽)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 영어로 쓰면 Elegy(Adagio), 한국말로 ‘비가(천천히)’. 한 번 들어보자. 소비에트 체제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걸 각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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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카소의 거지 같은 그림,
왜 이렇게 공간이 가는지요.

집에 <개구리>가 없더라구요.
지금 사야 하나 빌려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Falstaff 2018-02-06 16:17   좋아요 0 | URL
전 피카소 그림 중에 정말로 낙서 같은 <블루 누드>는 좋더라고요. ㅎㅎㅎ 그림은 무조건 보는 사람 맘대롭니다.
<개구리> 빌려보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