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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공동 역자 심규호와 유소영이 2012년 6월에 제주에서 번역을 끝마치고 ‘옮긴이의 말’을 쓸 때까지 이들은 그해 말에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지 몰랐던 거 같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소설가로 꼽힌다.”고 예언을 했지만, 아마 자신들도 예언이 그해에 당장 맞아 떨어지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안 놀랬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네 번째 읽은 모옌이다. <홍까오량 가족>, <열세 걸음>, <풀 먹는 가족>, 그리고 이번 <개구리>까지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읽은 작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모옌이 좋아하여 표본으로 삼은 작가로 로버트 그레이브스(이 양반을 포함했는지가 아리송하다. 모옌 아니면 라오서 둘 중 한 명인데),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꼽았던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네 권으로 조금 과하게 단정을 하자면, 포크너와 마르케스의 결합 유전자가 모옌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대단히 재미있고 중의적인 작품들을 썼음에도 모옌을 읽을 때면 거의 언제나 등장하는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아몰랑 사조思潮’같은 문학적인 환상요소가 다분히 들어있다. 물론 <개구리>에도 잔뜩 있고.
‘완신’이란 이름의 한 여성이 있다. 당연히 중국 여인이고, 모옌의 진짜 고향이며 그의 작품들의 지리적 무대인 산둥 성 가오미 현 둥베이 향 출신으로, 아버지는 일찍이 대일투쟁 당시 노먼 베순 박사를 사사한 외과의사로 팔로군 군의관을 역임하다가 의사로 높은 이름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모시고자, 적군이자 스스로도 외과의사인 일본군 파견대장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한 배갈 세 근을 마신 다음 나귀를 타고 담판을 지으러 가다가 아군이 뿌린 지뢰를 밟아 폭사함으로써, 독립투사의 딸이란 높은 이름과 출신성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영웅의 딸답게 성격 호방하고,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며, 그러면서도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은 외모로 숱한 젊은이의 심장과 생식기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충격파를 주었으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감히’ 이 여성에게 대시를 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이가 우리의 주인공 샤오파오의 오촌 고모인데 여기선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고모’, 샤오파오 뿐만 아니라 샤오파오 또래부터 그 아래 모든 세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고모’라고 호칭하는 인물이다. 나도 그냥 ‘고모’라고 하겠다.
당시 둥베이 향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조금 어렵게 나오면, 늙고 더러운 산파들은 관습적으로 산모의 배 위로 올라가 압박을 가해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고모가 처음 둥베이 향에서 머리가 아니라 팔부터 나오려고 하는 아이를 받으러 가보니 늙은 산파가 그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건장한 팔로 확 밀어 나가떨어지게 한 것도 모자라 냅다 달려가서 늙은이의 턱주가리를 발로 힘차게 걷어차고는, 코가 큼지막하니 잘 생긴 남자 아이를 받아내는 쾌거를 올렸던 것이 1953년. 이 아이가 고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받은 첫 번째 아이로 이름이 천비. 코가 잘 생겨, 성이 천千이요, 이름을 ‘코’ 비鼻로 했는데, 당시엔 이름으로 신체의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천비의 두 번째 딸도 고모가 받았고, 그 아이는 눈썹이 너무 고와서 이름이 천메이千眉. 둘 다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왜 중요한, 그것도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하여간 고모가 처녀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은퇴하고 나서도 가끔 받은 아이를 다 합하면 1만 번. 갓난아이의 몸무게가 3kg이라고 가정하면 무려 30톤의 아이를 받았다는 거다. 끔찍하지? 대한민국도 대한민국이지만 중국인들의 놀라운 번식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을 잊는다. 어떻게 한 사람이 30톤의 아이를 받을 수 있느냔 말이지. 그것도 거의 실수도 없이 말이야.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봄은 찾아와 연애다운 연애, 인생 딱 한 번의 연애를 한다. 상대가 누구냐? 왕샤오티라는 이름의 전투기 조종사.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라면 최고의 엘리트에다 최고의 출신성분으로 더 좋을 수 없는 신랑감이었단다. 그러나 좋은 일 속엔 언제나 마가 끼는 법. 더구나 한 소설의 주인공에게서는. 구름 한 점 없이 곱디고운 날, 왕샤오티는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타이완으로, 장제스의 품으로 귀순하고 만다. 그리하여 1960년대 대기근으로 중국 근대사 상 가장 어렵던 시절의 어느 날, 삶은 토끼고기를 냄비에 담아 고모에게 가져다 주던 샤오파오의 눈에 땅에 떨어진 삐라 한 장을 발견하고, 토끼고기보다 더 먼저 삐라를 고모에게 전해주었는데, 거기엔 타이완에 귀순한 왕샤오티가 잘 나가는 대만 가수와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고, 고모에게 적대적인 부르주아 출신의 의사가 고모를 거짓 증거와 함께 고발했으니, 아차, 당시가 가열찬 문화혁명의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재미있겠지?
이게 다가 아니다. 이제 1970년대에 접어든 중국은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위기의식이 바로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 실제로 당시 중국은 가족계획을 무지하게 잘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 즉 남조선을 멀리서 벤치마킹하기에 이른다. 계획생육計劃生育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중국의 가족계획은, 중국의 인구가 얼마야? 당연히 한국에 비해, 아니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혹독한 계획생육 작전에 접어들었는데, 누구보다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로 30톤이 넘는 아이를 받는 중이었지만, 이젠 유사시에 접어들어, 그에 못하지 않는 낙태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입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만 있나, 쉽게 요약해서 까고 묶고 꿰매는 거, 즉 정관수술까지 그야말로 신기의 솜씨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이젠 외동아이를 받는 동시에 그거 뭐라나, 그래, 루프 시술까지 자동으로 해버리는데, 중국의 남아선호 역시 한국에 댈 것이 아니어서, 피임에 대한 거부감과 아들이 나올 때까지 연이은 재출산에 대한 열망을 막아야 하는 영웅의 딸, 우리의 고모가 벌이는 눈부신 활약으로 인민들의 깊고 깊은 원한을 사고야 만다.
그럼 다 나왔다.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 최고의 남편을 만날 뻔했다가 만고의 역적으로 문화혁명을 거치고, 이어서 계획생육으로 숱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과 그를 바라보는 관찰자 샤오파오. 시대가, 당시를 거친 사람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소유하게 만들었겠으나, 무수한 탄생과 죽음, 여기에 어떻게 됐건 간에 출산을 욕망하는 인간 본성까지 덧붙여 이제 정말로 신화적 탐색이 가능한 지경까지 도달한 것이다. 모옌은 이 마당에 서슴없이 마르케스와 포크너가 애용했던 모호한 환상이란 양념을 톡톡 털어 넣어 마지막으로 한 바탕 씻김굿을 만들었다. 작가 고유의 담백한 문장은 독자를 즐겁게 하며, 역시 곳곳에선 눈물의 지뢰를 묻어놓았으니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가끔 주변에 누구 없나 눈치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