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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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위해서, 먼저 ‘앞선 독서’가 이루어져야 할 책이 네 권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마지막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감잡히시지? 옙.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멸망 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어야 이 책을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 대장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아가멤논의 친동생 메넬라오스의 처 헬레네를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잘 생긴 서자 파리스가 달싹 업어간 걸 다시 찾아오기 위해, 대군을 모아 수천 척의 무장 함대를 이끌고 출발하려 했는데, 아, 글쎄 바람이 불어야 말이지. 이때 트로이 출신의 배신자 칼카스란 이름의 예언자가 등장해 두 가지 예언을 하는 바, 첫째가 아킬레우스를 출전시키지 못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거, 둘째가 바람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가장 사랑하는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 아킬레우스는 영화 <트로이> 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하고 한 날 주지육림에 빠져 있던 걸, 친한 친구이자 원정 같이 귀찮은 일엔 절대로 빠지고 싶어 했으나 결국 참여하게 된 오디세우스를 보내 참전시키게 한다. 오디세우스 입장에서 가만 생각해보니 너나 나나 트로이까지 가서 쌈박질로 날 새우기 싫은 건 마찬가진데, 이제 자신은 빼도 박도 못하고 배를 타야하는 신세가 되니 아킬레우스 혼자 두고 가기가 진짜 심술이 났던 참이었다. 이거 내 말이 아니라, <카산드라>에서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정말로 이렇게 써 놓은 거다. 근데 이해하시지? 오디세우스의 심정.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은 만족시켰고, 두 번째,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얼굴 예쁘고 몸매 빵빵한 이피게네이아를 어떻게 죽여, 그 몸을 태움으로써 희생공물로 바치겠느냐고. 더구나 아가멤논이 이따위 미신을 정말로 믿었다고 믿으셔? 천만의 말씀. 문제는 다른 왕들이 전부 가기 싫어 뭉기적거리고 있으면서 그걸 핑계로 닻을 올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군대는 전부 불러놓았지, 그 많은 군대를 먹여 살리려면 아무래도 총대장인 아가멤논의 나라 미케네 살림이 날이 갈수록 거덜이 날 거 같으니 울며 겨자 먹는 셈치고, 어여쁘고 몸매 잘 빠진 이피게네이아를 정말로 죽여 불사르고 만다. 이제 출항을 막고 있던 건 다 사라지고 뿔 나팔을 길게 불면서 수 천 척의 무장 함대가 끝도 보이지 않게 줄을 이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향해 진군하기에 이르는데, 미케네 언덕 위에서 장엄한 함정의 대열을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있었으니, 아가멤논의 처이자 죽은 이피게네이아의 생모인 클리타임네스트라. 피도 눈물도 없는 아가멤논, 제발 살아서 돌아와라. 단칼에 네 머리통을 뽀개버리겠노라. 이를 뽀독뽀독 갈며 내려보고 있던 걸 아가멤논은 조금도 몰랐던 거디었다.
 트로이 전쟁 과정은 <일리아드> 참조하시라는 뜻에서 완전히 넘어가고,

 

 추천

 

 

 정작 나는 범우사에서 나온 책을 읽었는데, 그림은 아래와 같다.

 

 

 <오디세이아>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데 그래도 읽는 편이 좋아 꼽았던 걸 고백하면서,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데 그건 <아이네이스>에 와서야 비로소 “카산드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스> 읽기 싫으시면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을 감상하셔도 좋긴 하지만, <아이네이스>는 정말로 내가 애정하는 책이라 권하지 않을 수 없다.
 카산드라가 누구냐 하면,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정실부인 헤카베 사이의 딸이자 아폴론 신전의 신녀로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아폴론이 등장하더니 카산드라의 벌린 입에다 난데없고 버릇없이 침을 퉤, 뱉어버리는 거였다. 그 순간부터 카산드라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게 됐지만, 원래 그리스 시대의 신들이 아랫도리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 막 초경을 한 카산드라한테 한 번 자자고 했단다. 남녀가 같이 자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카산드라가 기겁을 해서 싫다고 했더니 아폴론이란 신이 장난을 치기를, 예언은 기가 막히게 정확한 예언을 할지언정 아무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을 거라고 부정을 태웠단다. 해변에 커다란 목마 하나만 남겨놓은 채 그리스 배들이 싹 물러가자 카산드라는 절대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트로이는 곧바로 멸망할 것이라 예언을 했건만 딱 한 명, 아니 한 식구, 아이네이스와 그의 현명한 아버지 안키세스만 예언을 믿어 배 한 척에다가 온갖 것을 싣고 지긋지긋한 트로이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니, 긴 항해 끝에 카르타고의 과부 여왕 디도를 사랑하는 척하다가 정신 차리고 이탈리아로 이주해서 로마를 건설했다는 얘기가 <아이네이스>다.


추천

 

 

 그러니 그건 꼭 읽으셔야 한다. 하여튼 어리석은 트로이 군대는 어마어마하게 큰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기 위해 성벽을 무너뜨리고 들였는데, 아시는 것처럼 한밤중에 커크 더글러스, 아니, 오디세우스를 필두로 막강한 그리스 군대가 성 안에 침입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을 벌이는 순간, 카산드라는, 너희들 내 말 안 들었지? 거 봐라, 하고 속으로는 조금 기분이 좋았다고 진술한다. 누가? 크리스타 볼프가. 볼프도 대단한 여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네 나라가 망하고 엄마 아빠 다 학살을 당하며, 심지어 자기도 얼마 있다가 죽을 운명인 것을 아는 카산드라가 설마,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서 웃기야 했으려고. 하긴 그렇게 쓰는 것도 작가의 권리다. 그런 의미에서 불만 없다. 아니, 정말 굉장한 작가적 발상이다.
 크리스타 볼프에 의하면, 이미 늙어서 발기부전 증세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취미로 여자 노예를 수집하던 아가멤논은, 자신이 발기부전이라는 사실을 발설하는 여자 노예는 극형에 처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랬음이 분명하다. 아가멤논은 카산드라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멀고 먼, 그리고 험난한 바닷길을 뚫고 꿈에 그리던 고향 미케네에 도착한다. 이 순간을 볼프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첫 문단이다.


 “여기였다. 그녀는 저기 서 있었다. 지금은 머리가 떨어져나간 돌사자들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때 난공불락이었으나 지금은 돌무더기가 된 이 요새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요새는 오랜 세월 망각 속에 파묻혀 있던 적敵과 긴 세월, 태양과 비바람에 무너졌다. 하늘은 변함없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높고 넓다. 거대한 돌로 쌓은 근처의 키클롭스 성벽은 예나 지금이나 성문으로 가는 방향을 가르쳐준다. 그 성문 아래서는 이제 피가 솟구치지 않는다. 가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살육의 집으로. 혼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죽으러 간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카산드라. 그녀는 미래도 과거형으로 말한다. 지금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에게 절절 매면서 아양 떨기에 여념이 없지만, 오늘 밤에 부부의 침상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휘두른 도끼에 정수리를 맞아 골이 튀기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인 것에 잔뜩 열 받아 애초부터 아이기스토스와 힘을 합쳐 남편 아가멤논을 쪼개버릴 작정이었던 여인이, 우습게도 이미 죽은 남편에 대한 질투가 남아 있어서인지, 카산드라, 자신의 목도 뎅겅 잘라버릴 예정이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카산드라는 강철의 날이 자기 목을 파고 들어오기 시작해 마지막 반대편 피부를 깨끗하게 도려낼 때까지 의식이 확실하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안고 성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1990년 봄. 왕복 2차선 국도를 시속 약 120km로 질주하던 나는, 공사를 하느라고 아스팔트를 파 놓은 걸 발견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했지만 결국 차는 파 놓은 골을 밟았으며, 그 순간 완전히 전복,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로 약 60미터를 좌~악 미끄러진 경험이 있다. 흔히들 짧은 순간에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이 다 보인다고 하는데, 그거 다 구라다. 큰 사고를 치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한 것이지 뭘 그리 허풍을 떨어. 카산드라, 마찬가지다. 위 인용문을 보시라. 돌무더기로 변한 성벽, 이게 미래의 상태인데, 지금은 태양과 비바람에 머리가 멀쩡한 채로 근사하게 돌사자가 서 있는 성문으로 올라가기까지의 짧은 순간에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네이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피난길에 오르고, 자신은 폭풍우를 뚫고 아가멤논과 더불어 미케네에 도착하기까지를 크리스타 볼프가 완전히 카산드라의 입장으로 본, 아무도 믿지 않는 정확한 예언을 해야 하는 운명의 여인이 겪은 드라마를 일인칭 시점으로 엮어 놓았다.
 그런데 <오레스테이아>는 왜 먼저 읽어야 하느냐고? 그거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운명도 아셔야 트로이 전쟁이란 거대한 서사를 ‘완전정복’할 수 있으니 그런 것이지.


추천

 

 

 

 * <카산드라>는 작년에 크리스타 볼프가 쓴 <나누어진 하늘>을 읽어보고 재미있어서 고른 책인데 <나누어진 하늘>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면서 또 재미있다.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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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3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카산드라> 는 말씀하신 저 책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친절한 포스팅~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근데 또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는 맹점이 하나 있는 게 만일 <일리아스><오딧세이아><아이네이스>를 읽어서 카산드라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독자에게는 제목만으로도 어쩐지 뻔한....(내용이 상상 가능한; -그러니까 뭐랄까 카산드라 입장에서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했을 것 같은) 책일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

Falstaff 2018-01-30 12:40   좋아요 1 | URL
재미난 것이요, 카산트라 캘릭터를 알더라도 크리스타 아줌마 입심이 을매나 좋던지 아예 <일리아스>를 다시 해석하고 있더라고요. 트로이 시내가 불타고 시민들이 작살이 나는 중에 한 구석에 박혀서, 것봐 내 말 맞잖아, 하면서 잠시 키득거리는 예언자라니 말입죠.
저는 ˝아무도 안 믿는 쪽집게 예언자˝를 동독, 서독의 통일환경에 빗대 쓴 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완전히 헉, 했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