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지음, 안정효 옮김 / 한빛문화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어머니의 정원>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앨리스 워커. 흑인 여성작가는 몇 명이나 읽어봤나? 조라 닐 허스턴, 토니 모리슨, 앨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 정도. 아, 말을 좀 바꿔야겠다. 노예였던 조상을 둔 흑인여성작가라고 정확하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거. 조라 닐 허스턴은 그의 빼어난 작품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하나만 읽어봤는데 굳이 무슨 문제나 의식을 염두에 뒀다고 말하긴 좀 그렇고, 나머지 세 명은 확실하게 흑백문제와 여성주의에 입각한 작품들이었다. 이들이 작품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작가들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상당한 부분에서 피부색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차별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며, 비록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직업생활을 얘기하자면, 내가 만 30년이 넘게 다국적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주 다양한 인종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와중에 다른 인종들은 몰라도 유럽 아이들하고 미국의 백인들, 얘네들하고 목을 내놓고 싸운다면 반드시 내가 이긴다. 다툼이 험하게 벌어지는 순간, 정색을 하고, 지금 너희들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무시하고 그런 결정을 하려는 것이지? 하고 하기만 하면 깨갱. 순식간에 싸한 분위기가 화면을 감싸고 순간적인 완전한 정적이 화상회의에 올라온 세계의 모든 회의장을 덮어버린다. 물론 자주 쓰면 절대로 안 되는 방법이다. 마치 비상砒霜, 즉 극약처럼 아주 드물게, 한 회사에서 최대한 두 번 가량 쓸 수 있는 초절정 필살기다. 필살기를 여러 번 쓰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덩치 큰 백인들의 눈가에 “육갑하네!” 비슷한 조소가 번지는 걸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모르겠고 흑백문제를 다루는 흑인 작가들의 경우에 아시아인이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다이하드 3>를 보신 분, 거수해보세요.
 거기서 정말 진상의 흑인이 하나 나온다. 새뮤얼 잭슨. 흑인 밀집 지역이자 우범지대에서 ‘난 깜둥이가 싫어’란 간판을 달고 어슬렁거리는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가 흑인 불량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 득달같이 나타나 윌리스의 목숨을 구해주긴 하지만, 뭐 하나 할 때마다,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흑인이라서 그러는 거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내는 캐릭터. 그래. 같은 얘기 자꾸 하면 싫증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주장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 때문. 그래서 차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하던 모르고 하던 간에, 싫증이 나고 지긋지긋하더라도 불만을 들어주어야 하고, 개선을 위해 애써야 하는 것.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인종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국가에서 온 사람들 우습게 보는 거. 이거 웃기지도 않는 일. 미국 가봐라. 남부 조지아 사는 중산층 백인이 나더러 그러더라. 아직도 전쟁 하냐고. 거기선 흑인들도 아시아인을 진짜 미개한 야만인으로 안다.
 <컬러 퍼플>은 1982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35만 달러에 영화제작권을 사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미국시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을 울린 바 있으나 안타깝게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은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열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차지하고 마는데, 이걸 두고 아카데미와 스필버그의 궁합이 안 맞는다고 매체에서 열라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만 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나도 몰랐다), 이 책은 언니 씰리가 하느님한테 쓰는 편지, 동생 네티가 씰리한테 보내는 편지, 언니가 동생한테 보내지만 배달 못하고 반송되는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서간체 소설. 서간체 소설이 예상외로 재미없다는 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유명한 작품 <위험한 관계>를 읽어본 사람들은 거의 동의하시겠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재미도 있다. 물론 앨리스 워커의, 초장부터 독자를 확 긴장시켜야 성공한다는 작전상 이유였겠지만, 흠, 비위 상해도 놀라지 마시라. 중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첫 부분부터 연이은 출산으로 지쳐 떨어진 엄마가 아빠와 부부생활을 거부하자, 욕정에 눈이 돌아간 미친 아빠가 큰 딸 씰리를 겁탈하는 장면. 그리하여 아버지의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고, 낳자마자 아빠가 아이를 시내 목사에게 줘버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렇게 근친상간부터 시작해 흑백갈등(과 백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흑인에 대한 린치), 남성에 의하여 여성에게 저질러지는 야만과 폭행, 자신의 몸에 대한 무지, 동성애, 제3제국에 대한 유럽/아메리카의 수탈 등 1940년대까지 인류, 특히 영어권 국가가 품을 수 있는 문제점 가운데 많은 것에 대하여 찬찬히 이야기한다. 배운 것 없는 시골뜨기에다가 검둥이 여자 자매의 시선으로. 그래서 워커의 문장 역시 문학적 수사법 같은 것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욱 간결하고 분명한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 괜찮은 흑인 남자가 있어, 여어어어얼씨미 일을 해 상점을 내고, 상점이 놀랄 만큼 잘 돼 땅도 사고, 집도 큼지막하게 짓고, 농장도 생기니까, 어허 저 깜둥이 봐라, 백인들이 작당을 해서 이제 부자가 된 흑인 남자를 붙잡아 일차로 절단을 하고, 이차로 불에 태워버린다. 이게 책에서 중요한 모티프인데, 정말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남부에서는 비슷한 일이 숱하게 발생했었단다. 다 아시잖아, KKK라고. 왜 굳이 이 단체를 거론하느냐 하면, 미국문학의 한 변곡점을 이루는, 아니면 적어도 평론가 몇 명 정도는 변곡점이라고 주장하는 작품, 마거릿 미첼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중요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애슐리, 얘가 KKK 단원이고, 흑인에 대한 린치를 미첼 여사가 은근히 지지한다는 거. 그거 한 가지 이유로 난 <바람과……>를 참 재수 없는 작품으로, 미첼을 역겨운 인간으로 딱 결정해버리고 말았다. 앨리스 워커의 정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인간이 바로 마거릿 미첼이다.
 <더 컬러 퍼플>의 내용은 뭐, 다들 영화 보셨을 거라 짐작해 굳이 이곳에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건,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었어도, 이 작품은 책이 훨씬 낫더라는 거. 그러나 이제 읽어보시려면 중고 책방을 찾아야 한다는 점. 원래 ‘한빛문화사’가 찍다가 망했는지 어땠는지(확인해보니 정말로 망한 거 같다. 마지막으로 책 낸 것이 2004년이다.) 이젠 ‘청년정신’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거기서도 그냥 절판시켜 버렸다. 그러니 읽어보시려면 도서관을 이용하시든가, 아니면 중고책방을 기웃거리셔야 할 듯. 나도 우리동네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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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1-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되고 나서 혼자 용감하게 극장가서 본 영화인데, 나중에서야 이 영화가 스필버그 감독 이라는걸 알고 깜짝 놀라고, 더 나중에서야 여기 나온 배우가 그 오프라 윈프리라는걸 알고 또한번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
아직 전쟁하냐고 물은 남부 조지아 그분은, 중산층이라고 해주기에는 (그게 지적 수준과 아무 상관없다고 하더라고) 너무 무지하네요 ㅠㅠ

Falstaff 2018-01-29 13:05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추억이 깃든 영화군요. ^^
참 재미있게 봤는데, 이제 하도 오래 전이라, 세상에나, 장가들기도 전이네요!, 이젠 영화의 내용도 가물가물해서 소설하고 어디가 다른지, 그것도 막 헷갈리더군요.
조지아 백인이 무지하다기보다, 아예 아시아 쪽으론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벌써 몇년 전 이야기이니 그 새 좀 나아졌다고 생각해야지요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