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랑 세계문학의 숲 32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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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가, 음, 이거 번역한 자가 누구지? 책 표지를 다시 보니 김석희. 다시, 흠. 이 양반 책은 좀 읽어봤지. 외국문학을 읽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역자 가운데 한 명.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다니다가 말았는데, 무려 4개 국가의 언어에 달통하니, 한국어, 불어, 영어, 그리고 일본어. 독후감을 쓰고 있는 2018년 1월 3일 현재 인터넷 책가게 알라딘 검색해보니 품절, 절판인 책 빼고, 성황리에 팔리고 있는 책이 168권. 품절, 절판된 책 포함하면 334권. 지금 만 나이로 65세. 워낙 머리가 좋아서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던 만 15세부터 번역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계산하면 334권 ÷ 50년 = 6.7권/연, 대학 신입생 시절엔 미팅도 하여간 좀 놀았을 테니 1년 빼고, 대학 2학년 만 20세부터 군대 면제받았다 치고 번역 책 냈으면 334권 ÷ 45년 = 7.4권/연. 어떻게 계산해도 적어도 1.6개월에 한 권, 즉, 석 달에 두 권씩은 책을 번역해냈다,가 아니라 번역한 책이 출판 돼 나왔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팔지 않아서 목록에 뜨지 않는 책은 한국의 출판사에 애초에 없었다고 가정해도 그렇다는 거. 석 달에 두 권.
 근데 내가 이 양반한테 정말로 경악하는 것은, 무려 세 달에 두 권씩을 팍팍 번역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번역한 한국의 언어를 읽어나가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거. 어떤 경우엔 모르긴 몰라도, 원문도 김석희 선생이 번역해 놓은 것보다는 매끄럽지 못할 걸?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로. 아, 이해한다. 전문 번역가라고 하면 번역만 해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석 달에 두 권 번역했다고 해도 번역료를 최대 권 당 1,000만원 잡으면 연 8천만 원. 그래, 만일 서울지역에서 산다면 이 수준으로 해야 그냥저냥 살림 꾸리는 수준일 것이다. (아무나 권 당 천만 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거, 명심하시라.)
 우리가 번역가 김석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야야 할 것. ① 적어도 석 달에 두 권씩 45년간 쉬지 않고 팍팍 번역할 수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② 아무나 석 달에 두 권 번역하는 게 아니다. 원문을 능가할 정도라고 독자가 오해할 수준의 균일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쉬지 않고 45년간. ③ 국내 최고 수준의 교정자에게 자신의 글을 교정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출판계에 끗발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책을 끝까지 감수하며 퇴고 등등을 하기엔 석 달에 두 권은 너무 많으니까. 그러므로, 위의 네 가지 조건을 다 맞추기 힘드니, 결론이기도 한데, ④ 번역가의 길은 집구석에 돈 많은 사람이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대빵이다. 하긴 어느 건 안 그래, 씨.
 근데 나는, 번역가 김석희의 문장이, 위에서 얘기했듯, 원문보다 더 매끄러운 것(처럼 읽히는 것)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아 같은 텍스트라면 이이를 피해가는 입장이었지만, 번역문학을 즐기는데 김석희를 피해간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도저히 피해갈 방법이 없다. 또 영어 번역판에 여사님 한 분, 흠. 그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하여간 일 년에 일고여덟 권의 책을 번역하는 초인적 작업을 홀로 해나가는 외로운 슈퍼맨이 이번엔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痴人の愛>를 번역했다. 이걸 <미친 사랑>이라고 한 것에 무지 불만이었다가, 책 뒤에 역자 해설을 보니 ‘미친 사랑’은 역자의 의도라기보다 책 많이 팔아먹기 위해 출판사 편집위원들의 권유를 그냥 수긍한 것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제목을 <어느 바보의 사랑>이라고 뽑았다는데, 나도 한 표. <미친 사랑>이 뭐야. 하여간 이 책, 이번엔 일본책도 김석희, 정말 얄밉게 매끄러운 문장들로 잘도 바꿔놓았다. 거기다가 책을 읽어나가다가 흐름을 자주 끊을 정도로 상세한, 읽은 다음 몇 초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각주까지 제공하는 세심함까지. 이러면서 1년에 7.4권 씩 45년간을 꾸준하게. 아, 놀라워라. (슈퍼 파월?)


 책을 출간한 시점이 1925년. 1차 세계대전 용 군수산업의 발달로 시작해 농촌인구의 지속적인 도시 집중화가 진행되던 시기. 우쓰노미야 촌놈 전기기사, 숫총각인 주인공 조지가 일 끝나면 할 일 없어 늘 다니던 카페에 한 꼬맹이 아가씨 접대부에 호감을 느낀다. 정말이다. 15세. 우리나이로 16세. 중학교 3학년. 생긴 것도 괜찮고, 말도 별로 없고 좀 우울한 성격이긴 한데 조지 말도 잘 듣는다. 음. 어감이 이상해. 조지 말도 잘 들어? 무슨 얘길, 16세 꼬마 아이한테. 그래서 이 아이를 데려다 영어도 가르치고 음악도 가르치고, 하다가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고, 미치도록 사랑하는 얘기. 이것이 다다. 하지만 이리 간단하게 얘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328쪽에 이르는 작품을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하루에 읽어치우게 만드는 문학의 힘. 정말 우스운 사랑 이야기, 원 제목에서 보듯 한 바보 남자의 쪼다 같은 사랑 이야기에 독자를 빠뜨리는 힘을 (일단 잘난 척부터 좀 하자) 우리는 문학의 효용이며 쾌락이라고 한다.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얘기할 때, 여인의 몸에 대한 탐닉이니, 사도-마조히즘과 결합한 에로티시즘이니 하는 모양인데 1920년대엔 그랬다고 쳐도, 근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냥 탐미주의,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면 안 될까?
 여기에서 작가가 탐하는 대상이 한 여인 또는 여인의 몸― 읽어보시라 한 여인의 정신세계는 절대 아니다 ―에 대한 탐닉이어서, 탐닉의 대상, 빌어먹을 행실을 결국 개 못주는 젊은 여인을 사랑하거나 추구하는데 어떤 장애 또는 장해도 불사하는 경향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 쓴 작품이라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이런, 책의 모든 것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여인의 무릎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하는 남자, 이름이나 다른 걸로 하지, 조지가 바로 책의 원래 제목에서의 치인痴人(원래 한자는 癡人), 즉 ‘바보’다. 서양소설에서는 이런 종류의 바보들이 왕왕 등장했는데(보바리 여사한테 남편 샤를이 바보 아니었나?), 동양 소설 안에서는 처음 발견했다. 사실 독후감에 ‘사도-마조히즘’에 대해선 쓰지 않으려 했다. 당신이 책을 읽은 다음에 이 소설 <미친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그것과 아주 유사한 장면들 위주로 책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 여기까지 하자. 왜 이름만 들어도 왠지 불편해지는 사도-마조히즘을 생각하게 될지는 책을 직접 읽어볼 분들의 권리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읽는 내내 주인공 조지의 행동이 너무 바보 같고, 바보 같아서 안타깝고, 나중엔 조지가 진짜 안타깝기만 해서(책 속에 들어가 도와주거나 충고해줄 수도 없잖은가!) 욕 나오고 콱 때려주고 싶다. 탐미주의 소설이라는 거. 준이치로와 그의 분신인 조지가 미학을 느끼는 것은 어린 소녀 나오미의 몸이라는 거. 이만하면 다 알려준 셈이다. 나머지는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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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0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김석희 선생 정말 대단하죠. 이 포스팅을 보니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저도 제목에는 좀 불만이 있었어요.... <치인(痴人)의 사랑>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2018-01-08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8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7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2-09-1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리뷰 오늘에서야 읽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신나게 읽고, 석 달에 2권, 계산해 두신 거 보고 한참 웃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22-09-13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