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뷰티 1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그러나 벌써 작년에) 제이디 스미스가 쓰고 김은정이 옮긴 <하얀 이빨> 독후감을 쓰면서 이이의 다른 책을 읽어보겠다고 했고, 읽었다. 재미있는 작품.
 아, 먼저 책 자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민음사가 찍었다. 페이지 수로 1권이 556쪽, 2권이 608쪽. 본문만 따지면 1,100 쪽이 훌쩍 넘어간다. 그러나, 종이가 아깝다. 큰 글자체에 널럴한 편집. 흰 종이 위에 검정 글씨가 드문드문 박혀 있는 듯해서, 2권, 본문 585쪽을 나 참 말도 안 돼, 하루면 후딱 해치울 수 있다(당연히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붙들고 있어야하지만). 베드씬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재미나는 소설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그렇지 580쪽이 넘는 책을 하루에 해치울 수 있다는 건, 책에, 종이 위에 공간이 너무 많지 않고는 생길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게 애들 읽는 그림책도 아니고, 삽화가 듬뿍 들어있는 동화책도 아니고, 남녀상열지사가 듬뿍(까진 아니어도) 씌어있는 19세 이상, 아니면 적어도 고등학생 이상이나 즐기는 책이건만 어째 이렇게 찍었을까? 아, 돈도 좋지만 종이 알기를 이렇게 우습게 알면 보르네오 열대우림 작살난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영생, 후세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좀 양심적으로 책 만들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책장도 좁아 죽겠는데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말이야.
 제이디 스미스는, 영국 백인 아빠가 자메이카 출신 엄마하고 결혼해서 만든 딸이다. 좀 미인이다. 사진은 <하얀 이빨> 얘기할 때 올렸으니 생략하고. 스미스한테는 자신의 출신이, 더군다나 삶의 거의 전부(그래봤자 아직 몇 년 되지 않는다)를 런던과 영국, 미국에서 지내야 했던 작가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완전 백인, 완전 흑인들의 묘한 눈길을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하얀 이빨>도 그렇고 이 책 <온 뷰티>에서도 그렇고 혼혈 가족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특별한 분위기를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다. 우연하게도 지금 책을 멀리 두고 독후감을 쓰게 되어 <온 뷰티>를 먼저 클릭해서 출판사 책 소개를 읽어봤다. 작품의 주요 무대가 이번에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보스턴 근교 웰링턴 대학이 있는 백인 부르주아 지역 웰링턴의 ‘인종적, 사상적 갈등을 겪는 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딱 규정하면서도, 역자 정회성은 결국 “사랑이 가득한 소설”이며 “대립되는 것들이 마침내 사랑을 통해 회해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했다. 이건 전적으로 출판사가 한 책 소개이며, 소위 ‘옮긴이의 말’이다.
 그럼 책 소개와 옮긴이가 한 얘기가 맞느냐, 하는 문제. 맞다. 적어도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동시에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도 읽고 저렇게도 읽는 것, 이게 바로 독자의 권리. 어찌 이를 포기할 수 있을까.
 앞에서 얘기했듯, 보스턴 근교, 택시 타도 도심까지 한 시간 가량 걸린다 하니 분당이나 일산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한 곳의 부르주아 집단 거주지에 웰링턴 대학의 종신교수직을 (호시탐탐) 노리는 하워드 벨시 교수가 먼저 살고 있었고, 이 양반하고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정도의 학문적 맞수이자 지금은 좀 더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영국에서 초빙되어 온 몬터규 킵스 교수가 새로 이사 왔다. 벨시 교수는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머리 하나 좋아 학문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다 미국에서 (노예 출신 조상을 둔 친절한 간호사였다가 부유한 병자로부터 거액을 상속받은 무지 부유한 여성의 딸이기도 한, 그래서 피부색이 아주 까~만) 초절정 글래머 미녀 간호사에게 반해 결혼을 해, 몇 년을 떠돌다 웰링턴에 거처를 정하고 2남 1녀를 둔 사람이다. 반면에 킵스 교수는 본인이 자메이카의 까~만 흑인으로 역시 머리 하나 좋아 영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무지하게) 돈 많은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영국에서 계속 교수직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벨시 교수의 주장에 태클 거는데 엄청 재미를 느껴 급기야 그가 재직하고 있는 웰링턴 대학에 초빙교수로 와서 아예 여기서 터를 잡으려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백인이 향유하던 기존의 특혜를 거부하고 흑인에게 보다 넓은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진보적 성향이 백인인 벨시 교수가 굽힘없이 흑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주장하는 측면인 반면, 진정한 권리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 ‘노오오오력’으로 제도권에서 인정하는 바로 그 권리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배려를 한다는 건 오히려 인종적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입장을 흑인인 킵스 교수가 취하고 있다는 것. 재미나지? 여성 작가가 남성의 시각을 이렇게 그려나가고 있다. 흑인 여성과 결혼한 백인은 흑인을 위한 정책을, 백인과 결혼한 흑인은 백인을 위한, 아니면 적어도 현상 유지를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있는 거다. 나는 이런 설정 자체가 제이디 스미스가 펼치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장치라고 여겼는데, 아쉽지만 독자서평이나 출판사 책 소개, 역자 해설 등에서 나와 비슷한 논조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내 의견보다 훨씬 더 재미난 스토리 라인이 마구 뒤섞인 작품을 읽노라면 그럴 수도 있다. 가족, 아니, 부부 간의 흑백 갈등. 130 킬로그램의 흑인 아내를 두고, 부부의 오랜 친구이자 가냘픈 체격의 백인 여교수와 바람피운 걸 들킨 벨시 교수는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아내에게 결코 자신이 한 눈에 반할 때처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해버리며(물론 오히려 아담한 사이즈의 여교수가 벨시를 자빠뜨린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했잖아. 그럼 유혹을 당했건 어쨌건 일단 이유가 안 되는 걸!), 이것보다 더 불행한 사실은, 무지막지하게 뚱뚱한 검둥이 아내를 이젠 결코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아직도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이 통곡할 만한 끔찍함이라니. 반면에, 또한 5천만 파운드를 호가할 그림을 보유할 정도로 막강한 재력을 자랑하는 흰둥이 아내를 둔 흑인으로, 자신의 사회적, 학문적, 대학 내 권위에다가 이스트를 팍팍 첨가해 마구 부풀려진, 다분히 허위적 부권父權을 가족에게도 과시해서 가족간, 부부간 거의 소통을 하지 않는 꼼꼼한 성격의 킵스 박사 역시 셜리라는 이름의 시적 재능이 있는 아가씨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에 젊은이들끼리 얽히고설킨 사랑의 실타래. 정말 재미나겠지? 이거 말고 사랑, 아니면 하룻밤 치정 같은 것도 있는데 그건 읽어보시기 바람. 진짜 끝내줌.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은 칼, 이란 이름의 래퍼. 길거리, 버스스탑이란 음식점을 겸한 작은 무대에서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하던 젊은이로 대변되는 빈곤한 흑인이 더 관심을 끌었다.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든 힙합 보이, 작은 아들 레비와, 레비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아이티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온 가난한 흑인들. 이들이 보기엔 킵스 박사가 자기 연구실에 걸어놓은 그림은 킵스(사실은 교수의 아내 칼린이 한 일이지만)가 아이티에서 너무 배가 고파 팔지 않을 수 없었던 화가로부터 겨우 3~5 달러를 주고 사왔으나 지금은 시가로 따져 작은 섬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그림은, 사실상 강탈이었기 때문에 아이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아이티의 잔인한 독재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온 흑인들은 백인들과 비교하는 건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고 심지어 같은 미국 내 흑인에 비해서도 훨씬 혹독한 급료를 받고 마치 150년 전 노예상태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미국 내 흑인인 칼은 중산층에 대한 깊은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적 역량을 눈여겨 본 벨시 교수와 불륜 관계를 맺었던 클레어 교수의 눈에 들었고 이에 벨시의 딸 조라의 협력으로 웰링턴 대학에서 클레어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웰링턴 가의 흑인 아가씨들, 조라와 킵스 교수의 아름다운 딸 빅토리아와 모종의 연애관계에 접어들면서도, 급기야 부르주아 계급 내부에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목불인견의 허위의식에 학을 질려 웰링턴을 떠나가는 장면.
 작가 제이디 스미스 본인이 영국과 미국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흑백 혼혈인데 어째서 적어도 이 문제는 그저 가볍게 스치듯 지나가고 말았을까. 스스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웰링턴에 사는 것이 합당한 성공한 유색인이라서 그랬나?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내가 진정으로 기대했던, 심지어 빅토리아 양에 의하여 벌어지는 시큰시큰한 베드씬보다 훨씬 더 기대했던 문제제기를 어떤 식으로 끌고 갈 것인지 알지 못하고 책읽기를 마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랴. 글 쓰는 건 전적으로 작가 마음인 것을.



 

PS. 민음사도 엉터리 주석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나흘 전, 키키는 엘리스 워커*를 모티브로 한 반즈앤노블의 토드백 바닥에서 다시금 카드를 발견했다.” (1권 432쪽)
 이렇게 써놓고, ‘엘리스 워커’에 각주를 달아 설명하기를,

 

 “* 1994 ~. 토니 모리슨과 함께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웃기다. 이 책의 초판이 2005년에 나왔다. 2005년에 소설도 다 썼다고 가정하자. 그럼 당시 엘리스 워커의 나이 만 11세. 몇 달 전 네이버의 민음사 카페에 오탈자 신고 게시판 달자고 순진한 회원이 제안한 적 있다. 눈만 뜨면 세상에 코미디는 넘친다.
 참고로 세상 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말씀드리면, 엘리스 워커는 1944년 생. 내가 좋아하는 여성주의 흑인 작가이기도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3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06-1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다른 책 읽다가 이 책 알게 되어서 한 번 읽어볼까 하고 검색했는데 폴스타프 님 서평이 이렇게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치정...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흠흠.‘

그나저나 앨리스 워커가 1994년 생이라뇨 ㅎㅎ

Falstaff 2024-06-17 06:02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특히 다락방님은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