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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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씨 451도면 섭씨로 몇도? 233도. 이 온도가 뭘 의미하는지, 누군가는 책을 불사를 때의 온도라고 하는 거 봤다. <화씨 451>을 읽어보면 그것도 말은 된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는 그저 책을 태워버리는 순간 등유가 콸콸 부어지는데, 등유가 어디서 부어지느냐 하면, 방화수放火手가 짊어지고 있는 통 안에서 나온다. 이때 통에 흰 페인트로 쓰인 숫자가 바로 451. 어, 그가 머리통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 쓴 헬멧에도, 불지를 때 입는 작업복의 소매에도 역시 451이라 씌어있다. 아하, 신기한 이름의 관청 방화서放火署의 고유번호가 451이구나! 그럼 방화서란 기관은? 처음 들어보시지? 몇 십 년 전엔 소방서라고 했었는데, 이제 모든 건물은 방화防火 처리가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지어지기 때문에 소방대원이 필요 없어지고, 필요한 것은 국가시책에 따라 집안에 서재를 마련해서 책을 보관하고 있을 경우, 모든 책과 함께 (방화防火 설비를 파괴한 뒤) 집까지 통째로 태워버리는 사람, 즉 방화放火하는 공무원을 방화대원 또는 방화수라고 하는 것. 같은 방화라도 방화防火는 불나는 걸 막는 일, 방화放火은 불 지르는 일을 일컬으니 읽는데 주의가 필요함. 사실은 같은 방화가 아니다. ‘방’을 발음할 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글을 쓸 땐 표기방법이 없으니 이것 참. 하여튼 알아서 읽으시라. 원래 훈민정음엔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즉 사성에 관한 표기가 있었는데, 쩝. 글씨 옆에 점찍은 거 보신 적 있을 것이다. 그건 그거고.
 그런데 뭐를 태워? 맞다, 책. 잠깐 다른 얘기.
 이 책을 번역한 박상준(혹시 민음사 사장? 아니겠지)은 80년대쯤에 ‘불량만화’와 ‘불법비디오’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불을 싸지르는 광경을 보면서, 위법성과 유해 여부와 관계없이 수많은 ‘이야기’가 없어지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중국의 분서갱유와 나치 독일에서 퇴폐문학에 대한 화형식을 떠올렸다는데 (옮긴이의 글, 6쪽), 왜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을까? ‘불량만화’는 어떤 걸 얘기하는지 모르겠으나, ‘불법비디오’는 둘 가운데 하나다. 포르노 아니면 불법복제물. 포르노? 좋다, 번역 문학가가 포르노의 자유를 외치는 건 타당하다. 나도 왜 대한민국의 성인들이 떳떳하게 포르노를 볼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해하는 족속이니까. 문제는 불법복제물. 출판인 혹은 출판 산업의 일원이 그걸 분서갱유나 책 화형식하고 같은 선상에 올려놓으면 안 되지.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큰 문제다. 아, 당장 자신의 입에 들어올 밥을 뺐기는 건데 말이야. 지금은 중국의 불법복제로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1980년대까진 대한민국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불법복제국가였던 거, 기억나시지?
 역자가 이런 얘길 한 것은, 이 책 <화씨 451>이 디스토피아의 미래,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분서갱유를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가 내분이 생겨 내란 중인지, 아니면 다른 대륙과의 피할 수 없는 전시상황을 맞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전제사항이 1990년 이후 북미에서 두 차례의 핵전쟁이 있었고, 그 다음에 권력을 쥔 정부가 국민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바지도 못하는 수백만 종의 책의 독서와 보관을 금지시켜버렸다. 그 다음부터 위에서 말한 소방대원의 후예를 방화수로 만들어 책을 보관하고 읽는 사람들을 적발하며 동시에 책들만 봤다하면 등유를 넉넉하게 끼얹고 확 불을 싸질러버려 왔던 것. 방화수들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월수금, 이렇게 일주 3일만 일을 하는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니, 슬로건이란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미국의 시인, 역자 주)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22쪽)
 책이 없는 국가. 그 속에 살아야 하는 국민들은 어떤 상태가 될까? 스포츠! 당연하다. 스피드! 당연하다. 이제 굉음을 내며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질주하다 차에 치어 죽거나 차가 뒤집혀 죽는 건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원자폭탄 한 방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는 꼴을 봤으니 그냥 한두 명 죽는 일은 사건도 아니다. 주부들의 제1차 목표는 거실의 네 벽에 몽땅 벽걸이 TV(그땐 LCD 뭐 이런 아이디어가 없어서, 놀랍게도 굉장히 얇은 브라운관 TV를 벽에 거는 수준이다)를 걸고 하루 종일 TV와 쌍방향 소통을 하며 지내는 것. 주부들은 모든 벽을 둘러싼 TV의 출연진들과 친척관계를 맺은 것처럼 생활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웃 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원이나 테라스 같은 건 유행을 핑계로 사라지고, 늦게 핀 민들레꽃을 이야기하다가, “꽃을 턱에 문질러 노란 색이 물들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래요.” 뭔가 어디서 읽은 듯하거나 사람의 정서, 심상을 흔들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거나 사라져버리는 미래의 나라. 며칠 전에 쓴 독후감 자먀찐의 <우리들>에서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익숙해진 바로 그런 디스토피아의 재현.
 그런데 더 이상 <우리들>, <1984>, <멋진 신세계>는 별로 읽히지 않는 반면, 앞의 세 작품보다 나을 것 없는 <화씨 451>의 인기가 갑자기 확 불타올랐던 건 왜일까? 왜긴 왜야, 그라운드 제로, 뉴욕 무역센터 빌딩 테러에 대한 공포감이, 북미대륙에서의 핵전쟁을 전제로 한 소설이면서도, 새로운 핵전쟁이 다시 북미,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썼으니까 그렇지. 아하, 맞아, 이런 작품이 있었지, 새삼스레 깨달아 영화로도 만들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
 다시 얘기한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가상의 디스토피아 소설. 연달아 디스토피아 작품을 읽으니 지루하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든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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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7-12-2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들어봤던 책이네요

Falstaff 2017-12-27 10:50   좋아요 0 | URL
이 양반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 열광하더군요.
흥미 있으시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