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가 계속 말썽이었다. 가장 좋았던 기계가 20여년 전에 당시 100만원 주고 산 인켈 제품이었는데, 10년 넘어가면서 특히 CDP에 문제가 가끔 발생하기 시작했다. 방음장치 할 수 없는 작은 아파트 살면서 그 정도 음질, 음량이면 나무랄 곳이 없었다. 결정적 실수는 좀 큰 아파트로 옮기면서 시작했다. 거실도 전과 비교해 넓직해 홈 씨어터도 개비를 하는 김에 인켈 시집보내고 소위 말해 돈 부족한 매니어 층을 위한다나 어쩐다나 특별히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전문 장비를 덜컥 들여놓고 시험삼아 바흐의 곡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를 탁 올렸는데, 아,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전문 장비가 인켈보다 훨씬 못했다. 거기까진 뭐, 그래도 들리니까. 더 큰 문제는 구입한지 5개월 만에 작동이 안 되는 거다. CDP와 앰프가 동시에 지랄이고 스피커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AS를 받으려면 장비를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라는데, 그것도 확실하게 고쳐준다는 보장이 없단다. 그냥 한 번 보내보라고.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 상상에 맡긴다. 벽 한 면을 꽉 채운 CD들은 나 좀 틀어달라고 아우성이고, 그 사이 CD장 하나를 더 짜서 이제 일렬로 도열해 있는 3천 장의 CD들 볼 면목도 없는데, 지난 토요일, 아 씨, 마누라가 50만원짜리 소리통을 이마트가서 사왔다. 나더러 선물이란다. 이렇게 생겼다.

 

 

다음과 같이 얘기하지 않으면 그나마 밥도 못 얻어 먹으니, 일단 고맙다고 하고, 첫곡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세시간 반짜리를 올렸다. 흠. 값하고 비교하면 괜찮고, 무엇보다 책 읽고 음악듣는 조그마한 방, 3 x 3.5 미터 공간에선 충분히 즐길 만한 음량이다. 특별히, 이름가르트 제프리트의 목소리가 이렇구나, 젊은 카를 리히터가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판, 아 이제야 내가 제프리트의 진짜 노래를 듣는구나, 하는 소감. 비브라토가 거의 없는 맑은 목소리가 바흐에 그렇게 어울릴 수 없었다. 특히 수난곡임에야. 아하, 이렇게 쓰고보니 내일이 성탄절인데 지금 수난곡 얘기를 하고 있구나.

 하여간에 첫곡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카를 리히터 지휘하고 아름다운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가 복음사가를 하는 판.

 

 

 

지금 보니까 카를 리히터가 1959년과 79년 녹음이 있다. 이건 59년 녹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왼쪽 거. 지금은 오른쪽 그림으로만 나오나보다.

 


 

다만 한 가지, 이 글을 읽고 덥석 <마태 수난곡>을 들으려 음반을 사시려 하는 분은 설마 읎겠지만, 에헤라, 혹시 계시다면 먼저 유튜브에 가서 과연 내가 수난곡을 끝까지 들을 수 있을까를 먼저 시험해보시라.
수난곡을 듣는 일 자체가 사람에 따라서는 대단한 수난이 될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수난곡passion을 듣는 일이 열정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당신이 옳고 그르고, 경건하고 아니고, 이 따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당신과 이 곡이 안 맞고의 차이일 뿐인데, 그게 생각보다 오지게 중요하다. 그러니 꼭 확인 부터 먼저 하시라. 난 수난곡하고 친해지기 위해 근 20년 이상이 필요했다.

 

 

 

 

 두번째 들은 곡은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바단조 작품 34.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람스.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왼쪽 그림인데 이젠 CD 장 수 늘려 오른쪽 그림으로 나온다. 장삿속이지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또 올린 것이 모차르트의 현악오중주 사단조 K.516

  

 

 이것 역시 모차르트의 모든 기악곡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몇개 되지 않는 단조 작품 가운데 K.516 과 K.516 b. 두 현악오중주가 단조로 되어 있다. 낭만주의 음악은 이미 모차르트에서 찬란하게 만개해 있었던 것이다. 3악장 느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이어서 하이든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작품 77-1, 77-2

 


코다이 사중주단의 하이든 전곡은 낙소스 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이든 자체가, 모차르트로 하여금 현악사중주 작곡을 자제하게 만들 정도로 일정의 고전적 규범을 완성한 이. 하이든의 사중주가 내 가슴을 쌈박하게 송곳으로 찌르는 것은 그러나 저 아득하고 아득한 잠깐의 휴지기. 완전한 고요. 희한하지. 잠깐의 고요, 적요가 주는 날카로운 긴장은 또 뭐야!

흔히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인간들이 하이든 알기를 우습게 알고 그러는데, 그거야말로 정말 웃긴 일이다. 당시에 어쩔 수 없이 대공의 그늘 아래에서 먹고 살았을 뿐, 후배 작곡가 누구와 비교해도 절대 뒷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오늘은 멘델스죤의 피아노 오중주를 들을 예정이다(사실은 이거 쓰면서 다 들었다). 비오시는 겨울의 휴일 아침. 책 읽고 음악 듣기 정말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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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도 사랑받는 남편이셨군요! ㅋㅋㅋㅋ 오디오도 떡하니 사오시고 ㅋㅋㅋㅋㅋ
좋은(?) 오디오 시스템도 갖췄는데 최근에 나온 이 앨범 한 번 들어보세요. (헐 근데 품절이네요..;;)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998349

Falstaff 2018-01-09 13:39   좋아요 1 | URL
헉, 페차의 <비창>인가요?
아, 클래식 음반, 그것도 CD가 인기를 끌 수 있군요!
처음 들어보는 연주단체인데 ㅎㅎㅎ 이런 거 소개하시면, 제가 음악에 관해선 지조가 없는 편이라 집구석 기둥뿌리 뽑힙니다.
옙, 기억하겠습니다.
근데 <비창>은 다 듣는 순간 갑자기 멍~하니 허탈, 허무, 허망해지지 않나요? ^^;

잠자냥 2018-01-09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비창>에 대한 폴스타프 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이 앨범은 2월 중순쯤에 재입고 되는 것 같아요. ㅎㅎ 그토록 많은 <비창>이 나왔음에도 또 나오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공감하실 음반이라고 생각됩니다. ㅎㅎㅎ

kyle 2018-03-28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분이 계셨다니 그저 반가워서 문자 남겨요

Falstaff 2018-03-28 08:2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탄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