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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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롱뇽과의 전쟁>을 하도 재미나게 읽어서 바로 그날 보관함도 아니고 ‘바로구매’ 버튼을 클릭, 샀다. 세 편의 희곡이 담겨있는 선집.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체코의 거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컫는 카렐 차페크의 작품답게 20세기 전반기의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는 <곤충 극장>과 <하얀 역병>,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걸작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의 원전을 읽는 기쁨은 실로 상당한 것이라 읽는 내내 매우 즐거웠다. 이제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자.
 <곤충 극장>의 등장인물은 나그네 한 명과 나비 채집에 열을 올리는 교수 한 명을 빼고는 전부 곤충들이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1막이 올라가면 나비들의 세상. 첫 페이지부터 나는 야나체크의 또 다른 오페라 <작고 영리한 암 여우>, 찰스 맥케라스가 지휘하는 파리 샤틀르 극장 실황 DVD에 재미나게 등장하는 무수한 곤충들이 번쩍 떠올랐다. 딱 그 수준의 무대를 생각하면 될 듯. 문제는 영상물을 난 봤지만 당신들은 아마도……. 나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와중에 이들 속에서 시인도 있고, 떠들기 좋아하는 것들도 있어서 서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2막에선 하루살이의 번데기와 쇠똥구리 부부, 귀뚜라미 부부, 유충을 키우는 맵시벌 아빠, 기생충 등이 서로 먹고 먹히는, 그냥 먹고 먹히면 될 것을 굳이 식량을 저장해놓음으로 해서 필요 없는 살상을 하는, 누가 읽어도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비판임을 알 수 있는 촌극이 이어진다. 3막은 두 개미떼들 간의 전쟁.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하고 숱한 살상행위를 벌이는 것에 대한 비난. 이건 마지막 작품 <하얀 역병>에서도 무거운 주제로 다시 읽을 수 있는데, 카렐 차페크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비가 됐건 쇠똥구리가 됐건, 아니면 하루살이나 개미떼들이 됐건 간에 그건 애초부터 사람의 실제 행위 혹은 당대 인간들이 벌일 수 있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작가다. 1920년대부터 일정기간 차페크가 본 서구사회는 사랑과 성에 관한 속박이 만연했으며, 부르주아에 의한 착취가 극에 달했고, 독재자에 의한 군비확장으로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두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곤충 자체가 인간이니까. 그는 작품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지금은 모든 인류가 엄정하게 눈을 뜨고 지켜볼 때라는 걸 호소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긴 한 작가 붓끝으로 어찌 황하의 물결을 막을까.
 실제로 <하얀 역병>에서는 ‘갈렌’이라는 이름의 의사 한 명이 강대국에 의하여 다른 강대국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큰 전쟁을 막아보려 애를 쓰는 스토리가 나온다.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사소한 명분으로 국민들을 호도해 흥분하게 만들어 전쟁에 이르고야 마는 독재자와, 군수산업을 필두로 하는 거대기업들. 15세기 검은 역병이었던 흑사병과 유사하게 전 유럽을 휩쓰는 하얀 역병, 그 치료제를 무기로 국가 또는 호전적 체제에 대항하여 외롭게 투쟁하는 의사. 그의 치료제로 과연 거대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역시 내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건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지 제일 공감을 했다는 말은 아니다. 가장 공감을 한 것은 차페크의 반전주의였다.) 이 드라마는 연금술사 아버지를 두었던 17세기 그리스 아가씨 엘리나 마크로풀로스가 주인공인데, 지금 나이가 무려, 자, 박수 준비, 우리의 전통, 그러나 일제의 잔재일 것처럼 보이는 337 박수, 삼백서른일곱 살이다. 연금술사 아버지가 드디어 죽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명약을 만들어 엘리나에게 준 것. 엘리나는 명약의 레시피 또는 처방전을 양피지에 적어 품에 안고 크레타 섬을 탈출해서 터키인지 어딘지로 도망한다. 이후 수없이 이름을 바꾸고, 아이도 열 댓 낳고, 숱한 사내들과 연애를 해 이날까지 온 거다. 지금은 에밀리아 마르티란 이름의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로 활약 중. 수많은 가짜 이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건 알파벳 이니셜로 E.M을 지켜왔고,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적도 변하지 않았다. 원래 그건 바뀌지 않는 거라며? 그러나 연금술사 아빠가 만든 명약도 약 300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 하지만 처방전 혹은 레시피가 적힌 양피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고 해도 떠돌이 아가씨가 온전하게 보존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신 100여 년 전에 잠깐 동거하던 남자의 집(저택 혹은 성)의 서류함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에밀리아. 사실은 몇 백 년 전에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니 뭐 당연하지만. 마침 지금 문제의 집과 장원, 토지에 관해 소송중이며 곧 판결이 나올 것이란 걸 신문에서 보고 변호사 사무실로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300년의 삶. 그건 너무 길고 길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환희나 행복이나 경이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세월. 깊은 심연에서 생명 없이 사는 것과 비슷한 삶의 이어짐일 뿐이다. 이런 양피지가 당신에게 주어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300년을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하고 활활 타는 아궁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린 결정이, 확실한가. 불멸은 재앙이다. 내 생각으로는.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원래부터 소리치기shouting와 (레치타티보가 아닌) 대사 비슷한 읊조림이 계속 나열되어 듣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그건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작곡가의 애로사항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야나체크가 이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 오페라로 만들었겠지만, 아이고, 희곡으로도 대사가 무지하게 많은 편이다. 그걸 가지치기 별로 하지 않은 것처럼 각색하면서 다만 4막 작품을 3막의 짧은 오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보고 들은 사람들도 원작인 이 희곡을 읽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적어도 이 드라마에 관해선, 나도 오페라작품을 좋아하지만, 희곡을 읽는 것이 갑이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유튜브에서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 마지막 부분을 링크한다. 이 영상물에선 주연 에밀리아 마르티가 죽고(죽은 것처럼 보이고) 조연 크리스티나가 300년을 살 수 있는 처방전이 적힌 양피지를 탐욕스럽게 품에 쥐는 것으로 끝난다. 오페라 대본에선 크리스티나가 벽난로에 던져버리는 반면. 그러면 원래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힌트. 둘 다 아니다. 그럼 어떻게? 안 알려줌. (궁금하시지도 않겠지만)

 

독일 바이에리쉐 국립 오페라 실황

 

 

 

 

* <곤충 극장> 제2 막 ‘청소부와 약탈자’에서 이런 지문이 나온다.
 “듬성듬성 풀이 돋아 있는 모래 언덕. 풀잎이 나뭇등걸만큼이나 두껍다.”
 잘못 읽었나? 풀잎이 나뭇등걸만큼 두껍다니.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나뭇등걸이 ‘그루터기’ 얘기하는 거 아냐? 수주대토守株待兎 할 때 주株. 사진으로 봬줘?

 

 

 나뭇등걸에 두꺼비 한 마리 올라가 있다. 이게 나뭇등걸 아냐? 어떻게 풀잎이 이만큼 두꺼울 수가 있냐고! 난 책 읽을 때, 이런 거 나오면 여간해서 다음 줄로 넘어가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끙끙 앓다가, 냉수 한 컵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읽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신발 신고 나가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책상에 앉아 그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 바로 다음 문장에 글쎄 이런 게 나오는 거다.
 “풀잎에 붙은 번데기 하나가 시체를 먹는 벌레 떼에 습격을 당하고 있다.”  (40쪽)
 에잇. 제목이 <곤충 극장>이면 곤충을 전부 사람이 연기해야 한다. 그러니 풀잎에 붙은 번데기도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풀잎에 붙어 있을 수 있겠냐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풀잎이라도 적어도 저 사진 만큼 두꺼울 수밖에 없잖아. 아, 성질은 급해서 말이지 그걸 못 참고 똥을 싸요, 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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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2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작가입니다! <호르두발>이나 <별똥별>도 틀림없이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지만지 책이라 좀 비싼 것이 흠;;

Falstaff 2017-12-20 10:13   좋아요 1 | URL
질문 있습니다!
ㅎㅎㅎ 그동안 지만지 책은 한 권도 사지 않았는데요, 그건 비싸서가 아니라, 정말 완역을 했을까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얘기하신 책들, 잠자냥님 읽어보시기에 완역 같았었나요? 그 출판사가 좋은 책들을 아주 많이 찍더라고요. 완역이기만 하면 진짜 고려해볼 만할 텐데요. ^^

잠자냥 2017-12-20 10:26   좋아요 1 | URL
네, 지만지 책이 완역이 아닌 것들이 있어서 좀 꺼려지지요. 그런데 <호르두발>이나<별똥별> 이번에 나온 것(하얀책표지)은 완역인 것 같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Falstaff 2017-12-20 11:2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얼른 가서 뒤져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