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것 대산세계문학총서 111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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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더라? 애정? 예컨대 헤세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소위 급식체로 쓰면 ‘헤세를 애정한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난 다분히 러시아 작가와 작곡가를 애정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생소한 러시아 극작가라는 점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어제, 퇴근버스에서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푹 빠졌고, 과하게 집중을 하는 바람에, 무려, 두 정류장이나 더 가서 내렸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지금 독후감 쓰는 날짜가 12월 14일. 오늘 최저온도 영하 14도, 어 춰!) 오다가 소주 두 병 사와서 다 마시고 잤다. 일어나 거울 보니까 저게 인간인지 한 마리 축생인지 막 헷갈린다. 그래도 마누라, 바가지 안 긁는다. 햐,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 물론 콩나물국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 책, 읽지 마시라. 밖이 내다보이는 버스 타고도 두 정류장을 더 가는데, 만일 지하철 2호선이라면 무한 순환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 편의 희곡을 담고 있다. <즐거운 죽음>, <제4의 벽>, <가장 중요한 것>.
 다 매력이 있다. 첫 작품 <즐거운 죽음>부터 난 극작가 예브레이노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다섯 명에 불과한 소품. 아를레킨, 콜롬비나, 피에로, 의사, 죽음. 스토리는 죽음의 침상에 누운 아를레킨이 죽음여사와 포옹하기까지. 전형적인 궁정 희극의 등장인물이 나오니, 당연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를 겸비해, 프롤로그에서는 피에로가 나와 지금 아를레킨이 죽어가고 있고, 자기는 아를레킨의 아내 콜롬비나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얘기로 배경 설명을 해주고, 짧은 에필로그에서도 나름대로 극을 정리해주는데, 에필로그의 내용은 안 알려드림. 이 작품을 읽고 예브레이노프가 상당히 감각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일까,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작품을 썼을까, 조금 궁금했다.
 <제4의 벽>에서 ‘제4의 벽’이 무엇일까. 일반적인 연극무대를 상상해보시라. 관객은 무대를 향한 터진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대사하고 노래하는 배우들을 본다. 이 작품에선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공연하는데, 극장주가 괴테의 조수였던 에커만이 쓴 책 <괴테와의 대화>를 보니, 메피스토펠레는 또 다른 파우스트의 자아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그러면 메피스토펠레는 극에 등장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라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도 노래해야 한다는 주장. 그런데, 파우스트는 테너, 메피스토펠레는 베이스. 어떻게 같은 사람이 노래를 해야 하나. 그냥 오케스트라가 조를 바꿔 테너 음역에 맞추면 된다. 마르가리타는 16세기의 촌년. 그러므로 맨발에 때가 줄줄 흐르는 거친 옷을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파우스트>는 중세 독일어로 노래해야겠지? 당연하지! 문제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를 소환하는 장소. 그게 말씀이야, 아시다시피 파우스트 박사의 방이다. 연극 또는 오페라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공연하려면 진짜 그 모습을 담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파우스트의 방구석은 벽이 세 개밖에 없느냐는 것. 그리하여 제4의 벽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 연극 또는 오페라 연출계의 이 놀라운 실험은 결국 이루어져 관객은 제4의 벽에 붙은 창문을 통해 파우스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재미있겠지? 이런 생각, 아무나 못한다. 책 뒤에 붙은 ‘옮긴이 해설’을 보면 러시아에선 예브레이노프 보고 ‘연극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아편쟁이’라고 한다던데, 이런 아이디어는 평생을 연극판에 있던 작자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거다.
 어제 나로 하여금 버스 정류장 두 개를 지나치게 했던 건 표제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4막 구성의 장편. 1920년대 중반에 쓴 작품이라서 이미 현대적 실험 같은 것이 가미되어 있다. 한 인간이 여러 인격을 갖추어 다양한 인간을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말한다고 해서 단순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한, 재미난 희곡을 읽을 때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두 편의 희곡이 다시 이 <가장 중요한 것>에서 재연하여 문학과지성이 이 세 드라마를 책 한 권으로 묶은 걸 납득하게 된다. 등장인물로 다시 아를레킨도 나오고 재미나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도 나오니 절로 웃음이 픽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쯤 구라를 풀어놓았으면 구미도 좀 당기시려나? 하여튼 읽어보시라. 물론 당신의 재미를 내가 보장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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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1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4의벽>에 대한 썰에서는 왠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덕구빌>에 연상되네요.

내용이 흥미롭기도 하구요, 항상 폴스태프님의
낚시질에 파닥거리는 일인이엇습니다.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아쉽네요.

Falstaff 2017-12-19 12:26   좋아요 0 | URL
지금 없는 거겠지요 뭐. ^^;
근데 언제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낚인 분들이 진짜로 읽은 다음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음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