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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ㅣ 창비세계문학 47
후안 마르세 지음, 한은경 옮김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당연히 처음 듣는 작가. 2017년 11월 현재, 알라딘에서 이 작가의 모든 책을 검색해보니 <떼레사……> 말고는 <여대생과 좀도둑> 딱 한 권이 더 있는데 절판됐고, 출판사는, 망했다. 근데 이렇게 재미나게 소설을 쓰는 작가가 왜 이리도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참. 내가 읽은 책은 스페인에서만 7판 째 찍은 책을 번역한 거다. 그래서 맨 앞에 작가의 “7판 작가의 말”을 붙였다. 초판 찍은 다음에 10년 만에 7판을 찍었으니 스페인에선 말 그대로 베스트셀러였던 모양이다. 하긴,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현대 스페인(어) 문학에 관심을 두어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한 건 영미, 불, 독, 일문학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긴 하지만. 책의 초판이 1966년이다. 무대는 1933년생인 작가가 23세였던 1956년. 그러니까 자신이 젊었을 때에 겪은 스페인 내 학생운동 세대의 지난 모습을 10년이 지난 다음에 뒤를 돌아보고 쓴 작품이란 뜻. 스페인 판 386이라고? 아몰랑.
1956년부터 한 1년 반 가량의 시대에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벌어진 학생운동, 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의 모습. 당시 유럽 어느 지역하고 비교해도 지난 세기 계급 또는 계급에 따른 차별이 강하게 잔존했던 시절에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자재들과 도시빈민 사이에 엄혹하게 존재했던 늪. 입으로는 평등과 분배를 웅변하지만 실생활에서 혈관을 타고 흐르는 계급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쁘띠)부르주아 자재들은 결코 두 계급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던 늪, 이젠 늪도 늪 나름이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냥 더러운 물이 조금 고인 웅덩이 정도로 좁아졌을지언정 그걸 건너려하지 않는다. 반면에 빈민 그룹의 대표 젊은이, 삐호아빠르떼(‘신분상승을 노리는 속물’이라고 각주에 적혀있다. 이하 “속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놀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신은채로 철벅거리면서 웅덩이를 건너 상대에게 손을 내민다. 한 방에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속셈으로.
이렇게 너절하게 쓰니까 재미없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마르세가 깔아놓은 건 젊은 남녀 간의 상열지사. “마르떼”는 ‘쁘띠’도 아니고 그냥 ‘부르주아’의 딸. 속물 마놀로가 오늘도 생업에 충실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에서 고급 오토바이 한 대를 (나중에 팔아먹을 속셈으로) 훔쳐 타고 바닷가로 놀러갔는데, 거기 한 여름별장에서 (쁘띠)부르주아 처녀총각들이 모여 파티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만다. 갖고 있는 거라고는 잔머리와 용기밖에 없는 마롤로. 아무렇지도 않게 파티에 참석하고 아주아주 괜찮은 아가씨 하나를 발견했으나 금방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린 다음 그냥 괜찮은 아가씨를 발견, 진을 콜라에 탄 칵테일 꾸바리브레 한 잔을 들고 접근, 크, 키스에 성공한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 금세 열이 올라 아랫배와 허벅지를 슬쩍슬쩍 마롤로의 몸에다 대고 비비적거리는 거 아냐? 으때, 재미 좋겠지. 그렇다. 읽는 재미, 죽인다. 이런 장면들이 야하지 않고 아주 장난스런 필체로 슬쩍, 마치 검지와 중지만 써서 튕기는 듯한 묘미. 이 다음이 궁금하시다고? 몇 달 후, 여름별장 2층 창문을 넘어간 마롤로. 드디어 달빛이 교교한 가운데 거의 홀랑 벗은 채 자고 있는 마루하 아가씨 방의 창문을 넘고, 숨죽여 침대에 올라 아가씨 옆에 눕는 데 성공하는데, 그러고 마느냐고? 아니, 다른 (모든)것도 성공한다. 알고 보니 마루하 아가씨, 프로페셔널을 아니지만 그래도 경험이 없는 게 아니라 (시절이 1956년이다) 그리 티내고 일을 치루진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조용하게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서 잠깐 붙인 눈은 여명이 밝아서야 깨고 만다. 그 순간, 우리의 속물 마롤로의, 잠에서 덜 깬 시선은 방의 바람벽에 머물게 되고, 여명은 바람벽의 옷걸이에 걸린 검은 공단 유니폼과 앞치마와 머리그물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몇 달의 고생을 바쳐 드디어 자빠뜨린 마루하 아가씨는, 아이고, 여름별장 주인집의 하녀였던 것이다. 이런 걸 ‘폭망’이라고 한다며?
마루하네 주인집, 그 속에서 외동딸의 이름이 책의 타이틀 롤, ‘떼레사’다. 1950년대 중반 스페인의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해나가던 소위 집행부, 또는 핵심으로 활약할 정도의 좌파. 떼레사와 그녀의 처녀성 훼손에 온 정열을 바친(적이 있는) 루이스 뜨리아스 데 히랄뜨로 대표하는 이들은 몇 년 지나면 빠른 시간에 스페인 내 좌파 운동이 그냥 생활, 삶의 작은 한 부분으로 바뀌는 걸 실감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쁘띠)부르주아 태생답게 지극히 자연스럽게도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자회사 사장, 여자 친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기업의 계열사 사장 등의 기업가, 변호사, 의사, 정치가, 그것도 아니면 룸펜 부르주아 등으로 퇴행해버리고 만다. 그럼, 자본주의 힘이 을매나 대단한데. 우리도 봤잖아? 젊어서 말 그대로 가열차게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무수한 인간들이 보수당 국회의원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대기업 상무도 되고, 부사장도 되는 거. 여기나 거기나 자본주의가 여간 힘이 세야지.
하지만 그건 10년 후에 일어날 일이고, 지금 1956년엔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 떼레사는 마롤로, 이 작자의 온갖 행태, 경찰을 피하고 은밀하게 돌아다니고, 중의적 이야기를 잘 하고, 심지어 단문으로만 대답하는 것들로 자기 마음대로 넘겨짚어, 속물이자 양아치이자 오토바이 절도범이자 잘 생긴 바람둥이를 사회주의 운동, 즉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착각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얼치기 운동가 떼레사가 마롤로에게 진한 호기심을 갖게 되는 기막힌 역전 상황. 마롤로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발의 미녀에다가 몸매 빵빵한 아가씨에게 접근해서 나스타샤 킨스키의 것과 비슷한 볼륨의 촉촉한 입술에 찐한 키스를 퍼붓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재수가 좋고 운이 좋아도 어디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 있나? 마롤로, 온갖 곳에서 떼레사와 진한 키스를 하고 여기저기를 주물럭거려도 딱 마지막 하나, 그게 안 되는 거다. 이제 갓 스무 살 넘은 마롤로의 신체조건과 정념과는 무관하게, 예를 들어 나일론 팬티(이렇게 쓰는 거 보다 “나이롱 빤쓰”가 어감이 훨씬 좋긴 하다) 한 장, 딱 하나 남았는데 ‘바로 그 순간’(뮤지컬 노트 제목하고 비슷하지만 하여간 그 순간)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려 늙은 식모가 출현해서는 눈알에 불을 키고 째려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끝장을 못 보는 거다. 그게 인생이지 뭐, 다 그런 거지.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사랑과 육체적 욕망을 사상적 동일성과 단단히 착각하는 떼레사. 떼레사를 사랑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하여간 그녀를 이용해 적어도 안정된 직장이라도 얻고 싶은 우리의 속물 마롤로. 그들을 둘러싼 (쁘띠)부르주아 계급과 도시빈민과 악당들과 (룸펜)인텔리겐챠 젊은이들. 그들의 환상이 비등점을 향해 끓어가는, 끓어갔던 시절, 1956년과 1957년의 스페인.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스페인(어) 소설, 은근히 끌리는 게 있단 말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