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에 츠바이크가 쓴 <초조한 마음>을 읽어보고 글, 스토리를 재미나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주로 전기傳記작품을 많이 쓴 츠바이크이며, 내가 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이를 읽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유독 작품이 눈에 띄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이름은 늘 기억해두고 있던 사람. 쇼핑 중에 이이의 이름이 딱 올라와, 그것도 전기가 아니라 소설작품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골라 사서 읽었다.
 세계사에서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분야에 탁월한 성과를 낸 민족, 유대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의 최고 업적 가운데 가장 눈부신 결과물이 혹독한 고리대금업이어서 그랬나, 이 머리 좋은 종족에 대하여 한 무리의 미친 독일인들이 앞에 나서 돌이킬 수 없는 학살을 꿈꾸던 것이었다. 학살 또는 학살의 예비단계가 곧 진행되리란 걸 눈치 챈 츠바이크는 아내를 데리고 런던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가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글도 쓰고 사랑도 하고 결혼까지 한 유럽을 향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자신이 유대인이긴 하지만 건전한 오스트리아 국민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에 (문서보관소에서 문서병文書兵으로)참전한 경력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오스트리아와 ‘고향’ 빈은 유대인 츠바이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렴. 하다못해 아인슈타인도 받아주지 않은걸 뭐. 하여간 스스로 유럽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츠바이크, 그가 쓴 <크리스티네…> 역시 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유대인 또는 유대인의 정체성 같은 건 발견할 수 없다. 작가 스스로가 한 민족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이었다는 말이 적당하겠다.
 소설은 1926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8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족, 일찍이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700년간 이어오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조종을 울린다. 그걸로 끝? 천만에. 전쟁은 전쟁을 백번을 해도 귀족과 대 부르주아에겐 (아들 몇 명의 희생을 담보로 해서)오히려 권력 또는 부를 강화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소부르주아 및 중산층은 아주 거덜을 내버리고, 그보다 아래인 인민들에겐 아주 적절하게 굶어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시공간인 1차 대전 종전 8년 후 오스트리아나 하인리히 뵐이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2차 대전 종전 7년 후 독일이나 서민들의 생활은 아주 정확하게 같다. 소설의 주인공 크리스티네의 집안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박제 장인인 호프레너 씨가 이끄는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크리스티네의 오빠가 전사하고, 전시에 박제를 구입할 인간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어 집안은 거덜이 나버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호프레너 씨가 죽은 다음엔 늙은 호프레너 여사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바람에 심각한 다리 부종에 걸리고 말아 어느덧 스물여덟 살이 된 크리스티네가 시골의 우체국에서 하루 종일 일해 번 돈으로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강퍅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 여기서 소설은 시작한다. 성당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며 자신은 도시의 빈민숙소에서 대충 잠을 자면서도 처자식 부양할 돈을 벌어야하는 뵐의 소설과 정말 비슷한 분위기.
 책의 원래 제목은 “Rausch der Verwandlung" 즉 <변신의 중독>. 그럼 이젠 ‘변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걸 이야기할 차례. 꽃다운 열여섯 살에 전쟁이 터져 스무 살에 끝났지만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크리스티네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것은 가난과 삶의 고통과, 하루 종일 일도 별로 없는 우체국에서 멍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권태와 극도의 촌스러움 밖에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하고 완전하게 똑같을 내일이 틀림없이 온다고 보장하는 나날들. 스물여덟 살, 어려서 소부르주아의 삶을 경험하여 빈곤하지 않은 생활이 어떻다는 정도는 태내에서부터 익숙한,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가난하고 권태로운 크리스티네에게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모가 한 명 있었다. 엄마의 동생이 젊은 시절엔 몸매 좋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백화점 여성복 코너에 옷 입어보는 모델 비슷한 직업의, 요즘 말로 일종의 연예인인데 당시만 해도 그게 손 타는 직업이었던 모양으로 무지하게 돈 많은 유부남과 아으 동동다리, 내연의 관계로 엮이고 말았단다. 클라라 이모가 또 속셈을 무지 밝아서 이 거물급 부르주아를 이혼시키고 자기가 본처 자리를 꿰찰 욕심을 품었고, 그걸 가슴 속에 품고만 있으면 어디서 티나는 것도 아니라 괜찮을 텐데 정말로 실행에 옮기는 바람에, 남편 바람피우는 걸 알지만 바늘로 애먼 자기 허벅지만 찔러가며 참고만 있던 본처께서 드디어 폭발하시어, 어느 날 호텔방에 들이닥쳐 벌거벗고 있는 두 연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아시지? 그리하여 소송까지 가게 될 찰나, 이 거물급 부르주아가 자기 위신 생각하느라 변호사를 통해 클라라 이모한테 거금을 건네면서 본부인께서 기소하기 전에 아메리카로 건너가라고, 그럼 한 달에 얼마씩 몇 년간 더 주겠다고,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단다. 거기서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반 볼렌을 만나 자기가 받은 위자료(위자료 맞지 뭐)를 종잣돈으로 목화 중개상을 해서 무지하게 큰돈을 벌어 대 부르주아 부인으로 에스커레이팅한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클라라’이지만 혹시 유럽 출신 인간이 자기 젊었을 때 벌인 눈부신 치정행각을 알고 있을까 싶어 ‘클라라’를 ‘클레르’로 바꾸기도 했단다.
 하여간 팔자 고친 이모가 이제 나이 들어 사업은 두 아들에게 맡기고 부부동반으로 유럽여행을 즐기기 위해 스위스의 고급, 최고급, 최상의 고급 호텔에 머무르다 우연히 그동안 편지 한 번 안 했던 언니 안나 생각이 나서 스위스에 놀러 오라고 청했다. 하지만 다리 부종이 심각하고, 전쟁 후 먹을거리 변변치 않아 날로 쇠약해가는 안나는 2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저히 가지 못하겠으니 젊은 시절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 딸 크리스티네로 하여금 평생 처음으로 휴가를 즐기는 기회를 갖게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노처녀 크리스티네가 샛노란 외투를 입고 두텁고 튼튼하지만 무지막지하게 촌스러운 구두와 가난뱅이들이나 들고 다니는 모조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고급호텔에선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등나무로 만든 가방을 든 채 2박 3일간 악명 높은 오스트리아 3등 열차를 타고 스위스 최고급 호텔에 도착한다. 완전 촌닭 itself. 여기서 크리스티네의 변신은 시작한다. 돈 많은 이모가 마치 때맞춰 호박 마차를 타고 도착한 요술쟁이인 것처럼 그녀를 목욕시키고, 자기 옷을 빌려줘 입게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화장을 하고, 걷고 앉는 자세를 고쳐주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알프스 최고급 휴양지 최고급 호텔의 신데렐라로 등극한다. 원래 좋은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의 손톱이 그동안 하도 험하게 할퀴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크리스티네의 변신이 이루어지자 ‘크리스티네’라는 이름도 발음이 더욱 매끄러운 ‘크리스티아네’로 바뀌고 성姓마저 ‘호프레너’에서 이모부의 성 ‘반 볼렌’으로 바뀌더니 한술 더 떠 독일에서 온 거구의 미남 엔지니어를 거쳐 ‘폰 폴렌’, 귀족을 칭하는 전치사 ‘폰von'을 달게까지 되는 거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네덜란드 사람들 이름 앞에 붙는 ’반‘은 귀족이나 기사계급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반 고흐, 귀족 아니다. 옷이 날개고 메이크업이 광채다. 날개 달고 광채를 날리니 오스트리아 촌년이 졸지에 독일 귀족 폰 폴렌 영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이 놀라운 변신Verwandlung!
 근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결코 동화작가가 아니라서 이리 휘황한 신데렐라의 탄생을 당연히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우리의 신데렐라, 크리티네 양은 유리구두도 남기지 않고, 생쥐가 변한 백마가 끄는 호박으로 만든 마차도 아니고, 샛노란 외투와 가짜 뿔 손잡이가 달린 우산, 등나무 재질의 여행가방을 들고, 걸어서 철도 정거장에 도착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3등 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웬일로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하냐고? 천만의 말씀. 신데렐라로 변신한 크리스티네가 호텔에서 어떤 영화를 누리고 어떤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과 육체적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뿐더러, 크리스티네에겐 어떤 방식으로 자정을 알리는 죽음의 조종이 울리는지 귀뜸도 하지 않았다. 맞지? 그거 알려드리면, 돈 주고 사서 읽은 나는 뭐야.
 더하기. 이게 끝이냐고? 하이고. 다시 화로의 재투성이 아가씨로 돌아간 우리의 신데렐라. 더할 수 없이 화려한 궁정 무도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하게 비참한 현실세계. 츠바이크는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가 직접 보고 경험한 바와 같이 극소수는 최상급의 휴양지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행위와 재화와 문화를 소유하고, 그들의 최고급 복지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극빈자들의 무한노동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에서 나온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개 같은 현실은 언제나 요지부동. 전후 빈곤의 벽에 꽉 막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의 오스트리아 젊은이로서 크리스티네. 그가 절망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건, 바로, 안 알려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11-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좀 끝이 급작스럽다는 느낌은 받지 않으셨나요? ㅎㅎ 츠바이크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미완성작품으로 보기도 한다더군요.

Falstaff 2017-11-03 10:5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과하게 친절한 에필로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제 때에 잘 끝맺었다고, ^^; 오히려 그래서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