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창비시선 253
문성해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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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이 <자라>다. 원래 제대로 쓰려면 《자라》, 이렇게 해야겠지만 특수문자 따오기 귀찮아 시집의 제목도 시의 제목처럼 그냥 <자라>라고 쓰겠다. 양해하시라. 근데 <자라>는 뭐야? 밤 열 한 시부터 방영하는 성인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애들은 자라”할 때 ‘자라’인지, 민물에서 서식하는 파충류 ‘자라’를 말하는지는 시집을 읽기 전엔 모른다. 나도 그게 뭔지는 밝히지 않겠다. 궁금하면 시인들이 하도 가난해서 밥은 말고 호텔 방만 좀 돈 안 내고 쓰자 했다가 쌍코피 나는 시절이니 웬만하면 직접 사 읽고 알아내시라.
 시집 <자라>로 말할 거 같으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5년에 나온 책으로 아직도 초판. 근데 1쇄인지 중쇄인지는 써놓지 않았다. 초판 1쇄일 거 같음. 참 시집 안 읽는다. 하긴 요새 시 좀 읽어보니까 이거 완전히 상형문자 혹은 쐐기문자 또는 암호 해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언제부터 이리 어렵게 쓰는 게 유행이 된 것인지, 한 20년가량 책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은 난 모르겠다. 어느 시절이나 어려운 시는 있었겠지만 이거 뭐 (거의) 전부 다 은유라는 핑계로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온갖 감정의 분비물이 질척거리는데다 감상의 과잉이 철철 넘쳐 한껏 질린 상태에서 문성해의 시를 읽으니 삼겹살만 잔뜩 우물거리다가 청양고추가루 듬뿍 넣고 무채 잔뜩 들어가서 국물이 찰랑찰랑한 배추김치 죽 찢어 입에 넣은 느낌이다. 그래, 여전히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비록 시집은 팔리지 않는 거 같지만.
 책을 펴면 맨 처음에 나오는 시가 이렇다.



 봄밤



 빈집 앞에서 쓴다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에 대하여,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다고,
 엉큼한 달빛이 꽃잎 벌리려 애쓴다고,
 나뭇가지를 친친 감은 가로등이 지글지글 꽂힌다고,
 봉오리들 아우성치며 위로 위로 도망친다고,
 추억의 등불 켜 다는 마음 약한 꽃들이
 나 같다고      (전문. 10쪽)


 으떠셔? 쉽지? 그렇다니까. 시인이 어느 봄밤 하필이면 빈집 앞을 지나다가 할로겐 (가로)등이 켜진 목련 나무를 본 거다. 그래 날은 봄밤이요, 빈집 앞에 가로등 불이 비친 광경. 한 눈에 딱 잡히시지? 이렇게 다 알 수 있게 쉽게 쓴 것도 아주 좋은 시인데 말씀이야, 그동안 너무 잘난 시들만 읽은 거다, 분명히.
 근데 문성해의 시 역시 <봄밤>처럼 다 아름다운 건 아니어서, 원래 시인들 거의 다가 그렇듯이, 삶의 비극적 모습을 그린 것도 많이 있다. 아무렴. 비극을 쓰지 못하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듯이. 같은 봄을 노래하는데 이런 봄의 광경도 있다.



 봄날



 목련이 내려다본다
 탁탁 튀는 장작 불꽃과
 부르르 진저리치는 연기를,

 

 목련이 내려다본다
 뜨락에 흩어져 있는 신발들과
 목련 나무 아래 묶여 있는 개를,
 개의 목을 파랗게 조여오는 쇠줄을,

 

 이윽고 물이 끓으면
 까맣게 그을린 껍데기가 벗겨지고
 왁자지껄 국그릇이 돌아가고
 목련 나무 아래,

 

 하얗게 뼈다귀가 쌓여갈 때까지도
 목련은 내려다볼 것이다
 조용한 봄날을 꿈꾸며     (전문 13쪽)


 비위 상하는 분도 분명 계실 것. 근데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 개 잡아먹는 거 뭐 이상해?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봄날 한 식구가 친척들 좀 불러 모아 앞으로 닥칠 여름에 대비해 (요샌 영양과잉 시대라 사실 필요는 없지만 무엇보다 맛도 있고 늘 해오던 연중행사라서) 개 한 마리 해먹는 광경이라 생각하면 이상한 거 하나 없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도 ‘산 개’는 질색을 하지만 ‘펄펄 끓는 개’는 아주 좋아하는 인종이라 이런 시 보면 얼른 달려가서 말석이나마 한 자리 끼고 싶으나,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김경복의 해설에 의하면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행태를 씨니컬하게 묘사”하며, “자신의 보신을 위해 타자의 생명을 아무 죄의식 없이 두드려잡는 욕망의 무자비함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고”있으며, “초점 화자를 ‘목련’이라는 사물로 내세워 비인간적 시점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타락한 행태를 차갑게 들추어내기 위한 방법적 대응”이란다. 아울러 “‘봄날’이라는 가장 안온하고 화평한 날이 실은 욕망의 잔인함이 극에 달한 추악한 날이라는 아이러니를 풍자로 보여주고 있다”는데, 하이고 어지러워, 이걸 종합하면 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프라이(N. Frye란 작자)가 분류한 악마적 이미지가 왜 이 시대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단다. (131~132쪽, 해설) 물론 일부 동감. 개를 안락사 시키지 않고 하필이면 목련 나무 가지에 교수형을 시켜 고통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거 한 가지만. 나머지는 동의하지 않음. 그래도 이 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봄날 벌어지는 그로테스크한 식욕에 관한 장면이란 건 확실하다. 그걸 대학교수처럼 이야기할 재주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은 차이일 뿐. 문성해는  이어지는 시 <여기가 도솔천인가>에서도 칠성시장의 개고기 판매점을 묘사함으로 개 도살에 관한 비관적,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루한 얘기지만, 우리의 이마트, 혹은 롯데마트의 정육코너에 전시되어 있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에 관한 심사숙고는 왜 생략하는 거임? 나처럼 산 개 싫어하는 인간도 있으며, 담배 피우는 인종을 증오할 자유가 있듯이 산 개를 안 보고 살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은, 사람도 아냐?
 이거 말고도 쓸 말 많은데, 참 난처하다. 지금이 오후 7시 10분. 아직도 저녁을 먹지 않아 길게 쓰지 못하겠다는 말씀.
 단 한 가지 지금 배고파 짧게 한 마디만 덧붙이는 걸 봐주신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다.
 “좋은 시는 읽고 나서, 읽자마자, 시인이 뭘 주장하고 있는지 잽싸게 알아챌 수 있는 시”란 것. 물론 나름대로 이해 또는 오해하기 위해서 같은 시를 두서너 번 더 읽으면 좋다는 건 당연한 말씀이고. 오해하기 위해서? 아무렴. 오해야말로 시를 읽는 독자의 특권이니까. 난 ‘펄펄 끓는 개’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죽은 닭 한 마리 배달시켰다. 나를 위해 생명을 거둔 암탉 또는 거세 수탉에게 심심한 애도를 바치기 위해 닭 넓적다리살과 더불어 쐬주도 한 병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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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배 피우는 인종TT 증오ㅠㅠ

Falstaff 2017-11-02 12:10   좋아요 1 | URL
30년이 넘게 하루 한 갑씩 담배 태면서 조국의 교육을 위해 열심히 세금을 내왔는데, 왜 그리 내 건강에 관심들이 많은지 국가는 물론이고 이웃, 지나가는 남자 1,2,3... 지나가는 여자 1,2,3.... 쌀집 남자, 국숫집 여자 기타등등 하나같이 지극히 제 허파와 분비샘과 하다못해 잠자리에서 발기부전 가능성까지 걱정해주는 게 하도, 정말 하도 드러워서, 담배 끊어버렸습죠. 참 드런 세상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