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창비세계문학 5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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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63세.
 이 할머니가 누구냐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샤를로트. 알베르트와 약혼 중, 그 새에 베르테르가 쳐들어오더니 할머니 처녀시절의 가슴에 살짝 불을 붙이고(키스 한 번 했나 안 했나)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처지를 비관해 성탄 전야에 머리통에다 권총을 발사한 얘기. 다들 아시잖아. 실제로 스물 세 살의 요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괴테가 잠깐 사랑했던 여인. 거기다가 유부녀를 흠모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자살한 자기 친구의 경우를 빌려 쓴 소설이 21세기 들어와서도 전 지구적으로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어서어서 연애하다 죽어버리라고 장려하는 의미에서 소위 청소년 추천도서들 가운데 제일 앞줄에 세워놓는 불후의 명작이 되고 만 바로 그 작품의 실제 모델 ‘샤를로트 케스트너’란 말씀. 뭐라? 맨 윗줄엔 ‘샤를로테’라고 써 있다고? 아시잖아, 창비식 외국어 표기법이란 거.
 괴테가 <젊은…>은 발표하고 어느새 (빠르기도 하지) 44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진짜로 63세의 샤를로테는 67세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바이마르를 방문해 그를 만난 일이 있고, 토마스 만은 그 사건을 콕 집어서 본문만 537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름하여, Lotte in Weimar <바이마르의 로테>. 20세기 중반에 재일 한국인 청년이 괴테의 짧은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한테 홀랑 반해서, 베르테르처럼 자살을 기도하는 대신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간판을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짓고 아직도 일본과 한국에서 빵빵한 재벌기업으로 이름을 날리니 바로 “롯데”인 거, 다들 아시리라. 그는 샤를로트 대신 당대 한국최고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중혼重婚을 감행해버리고 만다. 괴테와 <젊은…>을 좋아하는 남자는, 특별히 그가 무지하게 돈이 많으면, 그럴 수 있다고? 난 이 방면엔 별로 흥미 없다. 당연 관심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동서를 통틀어 유명짜한 인물이 바이마르, 당시 인구 6천 명밖에 안 되는 시골 촌 동네에 떴으니 그야말로 진짜 구경거리가 난 거다. 바이마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헌법 등등. 그러나 그건 작가 토마스 만은 경험해봤지만 작 중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점으로부터 1세기가 더 흘러야 등장하는 사건. 이거 중요한 거다. 작가는 100년 후의 독일,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3국동맹의 맹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말레이반도까지의 아시아를 제패할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3국 연합 더하기 영국의 거의 모든 식민지 군대 더하기 치명적으로 미국 군대까지 몽땅 몰려드는 판에 쌍코피가 나고 만다. 그래 생긴 것이 바이마르 헌법과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로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까지 독일이 다시 무장을 하는 걸 내버려둔다는 거. 1차 대전 이후 (특히 국경을 맞댄 프랑스 군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해왔던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가 권력을 틀어쥐고 다시 한 번 어지러운 유럽에 ‘질서’와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 지독한 독재 권력을 만든 다음 엉뚱하게도 유대인 박멸 작업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 이거 중요한 일이다. 작가는 앞으로 어떤 정치 경제적 변화가 독일 땅을 지배할지 알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노스트라다무스 찜 쪄 먹을 희대의 예언자 하나 정도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사실.
 이 시점에서 토마스 만이 100년 전 바이마르를 그린 소설. 독일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만년과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장소. 이미 추밀고문관 괴테의 위명은 전 독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성가를 떨치고 있어서 심지어 바이마르를 점령한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월드컵 우승하면 참가한 선수들 다 받는 훈장이고, 더구나 전시 나폴레옹 시대엔 개나 소나 다 받긴 했지만 프랑스 최고 훈장을 서훈 받는다는 건 따지고 말고가 없는 영광스러운 일. 그런 환경에 겨우 6천 명밖에 안 되는 도시엔 괴테 한 권 없는 집이 없었고, <파우스트> 1부에 나오는 구절 하나쯤 외지 못하는 시민 또한 없었으리라. 이럴 때 젊은 괴테가 쓴 공전의 베스트셀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인 샤를로트가 도착했으니 사건은 사건이었던 것. 샤를로트가 1816년 9월 22일 아침나절에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1699년에 개업해서 2017년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엘레판트 호텔”에 체크 인 하면서 일은 벌어진다. 숙박부에 이렇게 서명했던 것.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어깨너머 숙박부를 넘겨보던 수석 웨이터 마거, 이 남자는 로테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파우스트> 구절을 인용해가며 로테를 접대하던 인물로,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 성은 부프’를 읽자마자 좌불안석, 와들와들 떨기도 하고, 안색이 창백해지다가 불그스름해지기도 하고, 눈알의 홍채가 반응을 했다가 안 했다가 하기도 하고, 네 번에 걸쳐 로테로 하여금 자신이 <젊은…>의 그 샤를로테임을 확인하고야 마는 거다. 적어도 시민들의 문화적 방면에서 바이마르는 괴테의 도시 혹은 괴테 자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로테가 떴다는 말, 다시 한 번 강조. 아침에 도착했으니 늙은 몸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일단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 잠을 자려고 해도 갑자기 자리를 바꿔서 그런지 자는 둥 만 둥하다. 하여간 조금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니, 9월 22일에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해서 아무리 창밖을 봐도 흰 눈이 내릴 일은 없고, 대신 호텔 앞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 바로 로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시민들이 다 모인 거다. 당시는 19세기 초. TV도 없었고 인터넷은 물론 신문, 라디오도 없어 <젊은…>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을 한 번 보는 것이 세월이 지난 다음 얼마나 유세를 할 수 있는 일인지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 아무렴.
 침대에서 일어나 네 명을 ‘접견’. 맨 처음으로 영국인 아마추어 화가 아가씨가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우겨대는 걸 거절할 수 없어서. 두 번째로 괴테의 비서 리머 박사, 세 번째는 이름만 대도 다 아실 쇼펜하우어의 여동생 아델레 양, 네 번째로 괴테의 친아들 아우구스트. 바이마르에 도착해 네 명, 수석 웨이터 마거를 포함해 다섯 인물과 만남을 묘사하는데 토마스 만은 339쪽이 필요했다. 길어야 여섯 시간 정도를 묘사하기 위해. 진짜 이야기꾼. 바로 앞에 토마스 만의 친형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하고 극명하게 비교된다. 하인리히의 책은 부르봉 왕가를 여는 한 위대한 전사의 일생을 그리는 드라마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도 재미없는지 참 따분했는데 토마스 만은 그의 주특기, 이것저것 마구 끌어와 얘기하고 설명하고 다시 확인하는 복잡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쉽게쉽게 읽힌다.
 같은 날 오전에 샤를로테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괴테. 그가 자신의 작업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로테로부터 도착했다는 쪽지를 받고 3일 후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을 위해 토마스 만은 다시 100여 쪽이 필요했다. 이 장면에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가 자주 인용된다. 작품의 일부를 프랑스 작곡가 토마가 <미뇽>이란 오페라로 만들었으니 한 번 듣고 가자.

 

 난 마릴린 혼이 타이틀 롤을 노래하는 음반을 가지고 있으나 유튜브 검색하니 20세기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 이탈리아의 쥴리에타 시미오나토가 노래하는 것이 있다. 참 대단한 메조.

 

 
 이 책은 토마스 만이 쓴 괴테나 샤를로테의 전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설. 따라서 로테와 괴테가 만나 서로 나눈 이야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는 이야기, 이런 거 다 지어낸 거다. 전기는 모레 소개할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사람이 전공이다. 참, 츠바이크는 이 책의 뒤표지에 이렇게 평해놓았다.
 “수년 동안 기다려온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문학적 전기(傳記)는 최초로 완벽한 예술형식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려진 괴테의 초상은 후대에 유일무이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물론 추천사다운 과장이겠으나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츠바이크는 특히 반파시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반反 반유대인 정책을 반대해 온 만Mann 형제에 각별한 고마움이 없지 않았을 터. 토마스 만은 이 책에서도, 앞으로 100년 후 바이마르를 포함한 독일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정치, 군사적 형태를 알고 있기에 스스로 자기 자체가 독일이라는 약간의 오만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책에서 괴테 자신이 독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독일 민족의 야만성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곳곳에 비의를 숨겨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로테가 수석 웨이터를 제외하고 세 번째 만나는 아델레 쇼펜하우어 양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줄곧 받았던 인상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으면,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무리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복종하려는 충동이 발동해서 그들의 주인이나 총애하는 사람들 자신을 망쳐놓아서 우월감을 남용하도록 부추긴다는 거였어요. (후략. 170쪽)
 
 독일 사람들은 앞에서 인민을 이끄는 영웅이 발견되면 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복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영웅이라 함은 1816년 바이마르엔 괴테일 수도 있고, 100년 후엔 말만 잘 하는 키 작은 외톨이 육군 상병 아돌프 히틀러일 수도 있다. 이미 1350년 독일 땅 에게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 사건 당시도 괴테의 입을 통해 설명이 되는 바, 다음과 같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유대인인) “그는 모든 걸 잃고 맨몸이었지만 에게르의 시민이 되었고, 그래서 자부심을 가졌겠지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잔호간 짓을 저질러도 흥분이 가라앉으면 속죄의 대범한 제스처를 즐기면서 대충 넘어가고 말지요. 그걸로 잔혹행위를 보상했다고 여기는 것인데,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감동적인 면도 있지요. 집단 속에 있을 때는 자발적 행동이 어렵고 되는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런 돌발행동은 한 시대의 정신 상태에서 빚어지는 예측불허의 재난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490쪽)

 이걸 읽으면서 독자는 괴테를 보면 안 된다. 비록 말을 하는 사람은 괴테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괴테의 웅변을 빌려온 사람은 작가 토마스 만이니까. 그의 다른 작품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노골적으로 전쟁 중 폭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등장하여 독일 파시즘과 전쟁을 비판하기도 하는 등(비록 작가는 미국에서 폭격의 위험 없이 소설을 썼지만), 형 하인리히 만, 아들 클라우스 만과 더불어 개인의 안락을 포기하고 반파시즘의 앞에 서 온 것은 기념할 만하다. 독일인들이 영웅을 추앙하며 영웅의 언어 하나하나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마치 집단 최면인 듯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을 토마스 만은 “비굴한 열광”이라 칭하며 그건 “노예근성”에서 비롯한다고 정의한다. (따옴표는 493쪽)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민족성을 100년 전 문학적 성인聖人이라 칭하는 괴테에게서도 발견해내는 감식안이란 참.
 물론 이 책은 1930년대 독일의 정치, 군사적 망령을 비난하고 환기를 요구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주제는 괴테를 44년 만에 방문해 친견한 옛 친구 샤를로테, 그녀와 그를 통한 시간의 흐름과 나이 먹음, 기억 속의 그림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간극. 시간의 윤회랄까 사이클이랄까 (윤회와 사이클은 당연히 다르다), 시각의 변화 등등에 대한 정의. 이런 것이다. <파우스트 박사>의 주제 역시 반파시즘이 아니었던 것처럼.
 만일 당신이 <파우스트 박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 읽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토마스 만을 권할 때,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 작가를 읽으면서 ‘재미’를 찾는 경우보다는 ‘노잼’ 또는 ‘핵노잼’이라 선언하는 독자를 훨씬 많이 봤기 때문에. 그리고 얼핏 그들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지루함을 담보로 하는 재미.”
 위에 쓴 문장이 말이 된다면 이거야말로 토마스 만을 읽는 곤란함과 만족감을 한 방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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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고서점에 뜬 것을 보고는 사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사가서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나네요.

팔스타프님의 리뷰로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Falstaff 2017-11-01 15:34   좋아요 0 | URL
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책에서 토마스 만이 주장하는 것은 아예 써놓지도 않을 걸요.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좋은 책입니다. 나중에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