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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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독후감 쓰는 일은 이거, 보통이 아니다. '요절한 천재'라고까지 불리는 시인의 시집을 읽고 보통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적는 거, 이게 독후감이다. 미리 밝히거니와 전적으로 한 개인의 느낌이지 결코 '서평'이 아니라는 점. 나는 애당초 시를 평할 수 있는 안목하고 거리가 멀다. 기형도와 기형도의 팬에게 미리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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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이름은 무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본 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한 때) 가난한 학생시절엔 문학지 사서 볼 여유 같은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기씨가 이미 죽은 다음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을 때는 문학, 문학? 시·소설을 칭하는 문학 따위 잡스런 글을 읽어볼 시간이라곤 없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느라 (만일 회사 상사, 동료, 후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고 가정한다면) 여념이 없을 때였으니. 근데 왜 갑자기 기형도? 지난여름에 읽은 몇 권의 여성주의 소설 작품에서 유난히 기형도를 언급하는 거였다. 도대체 기형도의 시가 어떻기에 기형도, 기형도 하는 것인지 궁금해마지 않을 수 없을 정도. 꼭 읽고 말 것이다, 라고 작정하던 차, 때마침 눈에 띄어 날름 사서 읽었다. 어제 아침에 읽고 있는데 연휴라 집에 놀러온 큰 아이가, “어, 아버님도 기형도 읽으십니까? 전 <기형도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이라고 사뢰는지라, “너는 어떤 전차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느냐?”라고 물으니 “불민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이미 갈라선 전 애인이 문예창작과 졸업생이지 않습니까. 그 여인이 좋아하기에 무턱대고 사 읽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 이 기형도란 시인이 여성들이 좋아하는 시를 쓰는구나, 지레짐작을 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첫 작품 <안개>는 곧잘 읽히더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거 봐라, 도저히 (물론 일종의 성 차별적 언급이라 분류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시들이 아닌데, 싶은 거였다. 뭐랄까. 난 모르겠다. 원고지에 추상화를 그려놓은 듯한 시들. 이거 한 번 보시라.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포도밭 묘지 1> 부분


 두 번째 문장의 ‘그뒤에서’는 정말 그렇게 쓰여 있다. ‘그 뒤에서’라고 해야겠지만 혹시 시의 목적을 위한 표현일지 몰라 그대로 옮겼다. 그건 그거고, 이 시가 주장하는 것이 뭘까? 제목부터 좀 아리딸딸. 포도밭이면 포도밭이고 묘지면 묘지지 ‘포도밭 묘지’가 뭘까? 포도밭이 몽땅 죽어 또는 포도밭을 몽땅 갈아엎어 묘지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포도 농사가 폭삭 망해서, 또는 포도 수확을 다 해버려서 빈 밭이 마치 묘지 같았을까? 이 시가 2부에 실려 있다. 1부를 읽는 도중 내내 도대체 뭘 주장하는 거야,를 연발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큰 아이 빈둥거리는 침대로 달려가 (아파트에서 달릴만한 공간이 없으니 사실 이건 구라다), “네 엑스 애인 가라사대 도대체 기형도의 시의 어디가 그리 좋다고 하더냐? 나는 기형도란 인물이 유명한 건 서른 전에 생을 마감한 시인이기 때문이란 것이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한다.”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아이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도 조금 읽다가 때려 치웠습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 이 시집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박인환이 생각났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는 시 말이다. 그러나, 박인환의 시는 평이하게 외로움이나 그 비슷한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기형도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신만 알고 있고 품고 있는 모종의 이미지를 온갖 수사법을 동원해 나열해 놓고 있다. <비가 2 ― 붉은 달>에 자신 스스로 고백하길,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있는 거다. 폭풍주의보. 모든 수사법을 동원하여 끝없이 삐라처럼, 암호처럼 나열하고 있는 추상과 감상의 망토를. 그리고 불행하게 나는 암호 해독기를 장만하지 못했다.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을 볼까?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2연을 통째로 옮겼는데, 그래야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조차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 은밀히 포장해 놓은 포도송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리하여 제발 부탁하노니, 누구 시 잘 아시는 분계시면, 기형도의 시는 어떠어떠해서 좋은 시란 걸, 좀 가르쳐주십사,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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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어렵죠.. 은유도 많고, 시인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 같네요.. 시중에 유수의 문학평론가들이 ‘기형도론‘을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해 보시는게 어떨지요? ‘그 일‘은 아마 80년 광주를 말하는 것 같고, 입속의 검은 잎은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혀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습니다.

Falstaff 2017-10-12 11:27   좋아요 1 | URL
할 말은 많은데, 하기 싫네요.
광주와 방 안의 먼지와 검은 잎.
은유는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니고 가끔가다가는 끔찍하게 비겁하기도 하잖아요.
차라리,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버리는 김수영이 더 솔직해 좋습니다.

2017-10-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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