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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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하게 두껍고, 글자 빽빽해서 진도도 안 나가는 19세기 서양에서 쓴 번역 소설을 읽고 나서 곧바로 우리나라 말로 된 현대 소설책 읽을 때의 편안함이라니. 거기다가 출간 당시 나이 만 34세 젊은 작가의 엽기발랄한 말장난까지 난무하는 경쾌하고 자유스러운 작품을 읽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뭐라? <달콤한 나의 도시>가 경쾌하고 자유스러운 작품이라고? 그렇다. 근데 그건 책을 관통하는 작가의 어법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가볍다는 얘긴 아니다.
 내가 정이현을 주목하게 된 건 그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다. 거기서 그는 자기 세대가 남자건 여자건 나이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정해진 이정표에 까지 걸어가면 이정표 옆에 ‘입학’과 ‘졸업’을 지나 ‘취업’에 이어 ‘결혼’, ‘출산’, ‘둘째 출산’이란 지시판대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행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마지막 세대쯤이라고 강조하는데,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는 그런 일상적 단계로의 이행에 관한 딜레마를 (소설의 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이) 불행한 세 여성을 통해, 약간은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책의 발간 시점이 <달콤한…>이 2006년, <오늘의…>가 2007년이지만, <오늘의…>는 단편집이라 각각의 단편을 발표한 시점이 <달콤한…>보다 늦다고는 할 수 없다. 뭐 그래서 두 작품(집)을 거의 동시에 발표했다고 가정해도 오늘 2017년엔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정이현이 서른다섯 즈음해서는 이미 청춘도 가버렸고, 이제 살면서 한 번만 더 실패하면 인생 전체를 실패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한데, 뭐 그 나이에,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똑같은 강박관념이 계속된다는 건 당연히 알지 못하겠지만, 하여간 그리하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 직업과 직장과 결혼 같은 것들을 실수 없이 해치워야 한다는 집념이, 그중에서도 결혼이라고 하는 분명한 지옥 속으로 빠져야 한다는 데 대한 비극적 갈등과 한편으로는 기꺼이 바로 그 지옥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랄까, 자연스러움이랄까, 그것도 아니면 보험이랄까 할 것들에 대한 미련과 동시에 거부감까지를 집중 탐구하고 있다.
 몇 번의 연애 끝에 비뇨기과 전문의를 골라 결혼에 성공하는 재인이는 난리굿을 하듯 결혼한지 몇 달 되지도 않아서 결혼이란 것이 여자나 남자를 가리지 않고 양쪽모두에게 똑같은 지옥이라는 걸 확인한 후 정식 부부의 연을 끝내는 걸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하고 이혼해버리고, 근 십년 전 용가리라는 별명의 사내한테 장렬하게 버림을 받은 후 시니컬한 능력자의 독신녀로 살다가 새삼 느낀 바가 있어 잘 나가는 직장(그것도 과장 자리를) 때려치운 유희는 난데없이 꿈을 찾아 뮤지컬 가수 지망생 노릇을 하는 와중에 그 우라질 용가리가 딸 하나 둔 이혼남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다시 정분이 생겨버린다. 이 두 여성은 우리의 주인공 은수와 함께 어려서부터 대나무 말을 타고 논 옛 친구들로, 은수가 과거에 벌인 몇 번의 진한 연애와 실패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뿐더러 지금 현재 한 방에, 졸지에 생긴 세 명의 남자와의 관계까지 뚜르르 꿰고 있다. 세 명의 남자라는 건, ① 남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그날로 같이 자고 이후 만나기만 하면 술 마시고 섹스하는 습관을 들인 일곱 살 연하 ‘태오’란 이름의 매우 섬세하고 은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키스의 초절정 고수, ② 여태까지 10년이 넘게 그냥 친구 사이였던 부동산 부자의 상속자이자 유희의 사촌 ‘유준’으로 하루 24시간 오피스텔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은둔형(외톨이는 아니고) 인간이었다가, 애인과 헤어진 후 은수하고 ‘그냥 친구’에서 ‘남자 친구’로 전환하기 위해 지금은 비록 은수가 두 명의 애인이 있으나 언젠가 그 사람들과 헤어지면 그때 결혼하자고 갑자기 중학교 학원선생으로 취직해버린 늦깎이 직장인, ③ 아주 기본적인 외모와 친절로 무장한 중소기업 사장 김영수란 작자로 은수와 맞선을 봐 연결이 됐으나 엄격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식 아래 모든 일을 선 안에서 수행하려는 인간이지만 예상 외로 무지하게 자상한 측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특정 환경에선 매우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기도 하는 다섯 살 연상의 남자를 말한다.
 등장인물 소개를 빙자한 소설의 내용은 이쯤이면 됐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 결혼, 인간이 만든 인간을 구속하고 급기야 지옥으로 만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처하는 젊은이들, 서른하나 부터 둘까지 젊은 여성 특유의 엽기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입담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앗, 큰일이다. 여기까지 쓰고 쐬주 한 병 마셨다. 술기운 퍼지기 전에 얼른 써야 한다.)


 솔직한 감상을 쓰자면, 먼저 내가 50대 후반의 남성이란 점을 먼저 밝히고(작중 주인공이 30대 서울 시민이란 점을 강조했듯이) 얘기하자면, 독후감을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한 것과 같이, 외국 소설의 길고 긴, 근데 재미는 별로 없는 번역물을 읽다가 현대 여성이 쓴 재기발랄한 우리 말 소설을 읽을 때의 환희와 재미의 감격이, 여기서 주목하시압, 넘쳐나서 소설의 주제가 주는 묵직함을 과하게 엽기적 깜찍한 언어로 하지 않았는가, 하는 조금의 아쉬움을 숨길 수 없다. 정이현, 참 좋은 작가다. 요새 작가(라고 해도 내 기준이며 젊은 독자에 따라선 벌써 맛 간 작가일 수도 있는데)치고 참 이야기를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 마음에 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소설판에서 ‘읽는 재미’가 사라진 아쉬움의 ‘일부’를 정이현이 싹 씻어준다는 건 확실하다. 아직 이 작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고, 솔직히 그렇지도 않지만,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가까운 시일 안에 한 권의 책을 더 읽어볼 것이다. 그때 ‘또 한 권 더’ 혹은 ‘앞으로 계속’ 아니면 ‘이걸로 끝’을 결정할 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요한 여성 등장인물 은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김영수한테 청혼했으며(영수가 은수에게 청혼은커녕 신체접촉도 해오지 않아서), 재인이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 생활을 접어 이른바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서고, 유희 역시 직장을 그만 둔 다음 자신의 꿈을 찾아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 도전하면서 이혼한 옛 애인 용가리와 다시 접촉한다. 또, 남자 윤유준은 은수에게 프로포즈를 하고서야 생애 처음으로 직장, 즉 돈벌이를 시작하는 거. 작가 정이현이 꼭 찍어서 말은 안 했지만, 글을 쓴 시점 2006년에는, 2006년 까지도, 여성은 사회생활 하다가 (물론 남성과 비교해 더 힘겹게 직장생활을 했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게 힘들고 괴로우면, 결혼이라는 도피처로 날아가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집중 탐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힘들고 역겹기까지 한 경제생활 또는 정글 속 생존을 남성에게 일임하기 위한 결혼의 측면도 역시 한 번 쯤 꼬집고 넘어가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또 하나, 수구 골통에다 돌이킬 수 없는 틀딱임에 틀림없는 은수의 아버지. 은퇴한 다음 이제 산악회에 가입해 등산 하나에 취미를 붙이고 나머지는 경제생활을 하던 때와 똑같이 집구석에서 위세잡고 독재하며 깽판부리는 역할로 등장한다. 은수 엄마는 이런 남편하고 살면서 원래는 밝았던 성격마저 우울해지는 증상을 겪은 피해자로 역할을 맡는데, 깨놓고 얘기해서, 은수 엄마는 김포 아줌마라고 하는 오랜 친구라도 있어서 같이 영화도 보고 외출도 하고 이러는 반면, 은수 아버지는 그 양반 나이로 미루어 짐작해, 정말 뼈 빠지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리가 휘고 그러다보니 생전 친구 하나 만들지도 못한 건 물론이고, 있던 친구들도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아 점점 멀어져 외톨이로 사느니 마음엔 들지 않지만 그나마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외로워 죽을 거 같아서 산악회 가입했는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다 애로사항이 있는 거다. 이놈이나 저년이나. 세상 사는데 그냥 칼같이 선 죽 긋고 착한 편은 내 편, 나쁜 놈은 네 편,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이렇게 썼다가 인터넷 어디선가에서 또 등 뒤에 칼 맞는 거 아냐?) 특히 결혼생활하며, 당신의 결혼생활이 지옥이었듯이 (다행스럽게 정이현도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내 결혼생활도 끓는 기름 솥단지 속이었을 수도 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나 참. 이런 얘기는 독후감으로 어울리지 않지만 굳이 평론가 흉내를 내자면, 서사는 좋은데 선택한 길이 좀 거시기. (용서하시라 이모티콘) ^^;



 어이, 기분 째져?
 아니, 아직 아냐.
 맥주 한 잔 더 해야지?
 아무렴. 지금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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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1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중 독후감..ㅎㅎ 완전 제스타일 입니다.

Falstaff 2017-10-11 15:5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