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세계시인선 3
랭보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평점 :
절판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변하지 않는 집념 속에 외국 시집은 여태까지 딱 한 번 사 읽었다. 발음하기 힘든 인간이 쓴 <마야꼬프스끼 선집>. 석영중 선생이 번역한 것. 왜 읽었느냐 하면, 단편소설선인줄 알고. 이왕 산 거 그냥 버리면 아까워서. 근데 굳이 랭보를 또 사서 읽은 건, 며칠 전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었는데, 랭보를 진짜 시인이라고 은유하는 걸 봐서 그랬다. 진짜 시인은 스무 살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난다나. 가짜 시인은 스무 살 넘어서도 계속 낙서를 하는 거고. 여기서 아프리카로 떠난 시인이 바로 랭보를 일컫는다. 그리하여, 당장 랭보를 검색했고, 이왕이면 (진짜 실력은 내가 아는 바 없으니 별개로 하고) 독자들한테 가장 유명짜한 불문학자, 유명짜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아깝게 죽기’에 성공한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김현(1942~1990)이 번역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골랐으며, 1974년에 초판이 나온 책을 굳이 껍데기만 달리한 요즘 책으로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해 중고책으로 결정해 택배로 받았는데, 세상에, 이게 중고야? 완전 새 책이다.
 감상을 한 마디로 하자면, 역시 소신은 함부로 꺾는 게 아냐. 책을 열면 왼쪽 짝수 페이지엔 한글 번역이, 오른쪽 홀수 페이지엔 원문이 원어로 써 있다.
 요새 내가 이렇게 쓰는 걸 맛 들였다. 번호 붙이는 거.
 ① 김현 선생의 직업이 학교 선생이라, 번역을 했는데 독자가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과하다. 직업의식이 강하게 발동, 곳곳에 각주를 두었다. 문제는 그놈의 우라질 각주 읽느라 감상이 안 된다는 거. 책에 처음 나오는 시를 예로 들어보자(다행히 짧기도 하다).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1)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2)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3), 자연 속으로. 


 

 1) 랭보의 현재 상태. 이 몽상의 상태는 저녁 들길의 신선한 감각과 대비된다.
 2) 사랑을 말과 생각에 대비시킨다.
 3) 이 직유로 판단컨대, <한없는 사랑>은 단지 사랑에 대한 막연하나 끈질긴 욕구일 것이다.




 이거 읽고 드는 기분은,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시 배우면서 이 시는 잃어버린 조국의 해방을 원하는 간절함이 주제고 소재는 우짜고저짜고 이런 느낌. 꼭 뭘 가르쳐주어야 마땅하다는 천생 선생의 번역이 아니냐고. 각주 1)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거고, 2)도 마찬가지고, 3)은 더구나 천생 선생마저도 “일 것이다” 즉, 아닐 수도 있는 걸 굳이 각주로 달아야겠느냐고. 완전히 교과서 읽는 거 같다.


 ② 시를 내용으로만 읽나? 시집을 읽는 내내 오른쪽에 불어로 쓴 시를 읽는 프랑스 사람은 어떤 감각일까, 이게 무지 궁금했다. 모르긴 모르지만 내가 읽으면 뭐 별로 공감하는 것도 없고 공명할 수 있는 운율도 없고, 색다르긴 하지만 정서상 그리 맞는다고 할 수 없는데, 그래도 명색이 세계 시인선 가운데 1번을 <악의 꽃>이, 2번이 <말도로르의 노래>가 차지한다면 적어도 3번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정도 아니겠느냐, 하는 거. 그 정도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면 뭔가가 있을 텐데 말씀이야, 그걸 모르겠다는 거다. 써놓고 생각해보니 수십 년 전에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민음사 책을 사놓고 아직도 안 읽었다. 여전히 책꽂이 한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③ 그리하여 주장하노니, 습관 함부로 바꾸지 마시라. 앞으로 나는, 역시, 번역한 시는 읽지 않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9-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찬가지 이유로 번역한 시는 잘 읽지 않는데요, 이 시리즈에서 셰익스피어 소네트 사보고는 완전 격분했습니다.... 전 소네트 154편이 다 실린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154편이 얼마나 한다고.

Falstaff 2017-09-29 10:33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는 전예원에서 예전에 나온 연두색 표지의 책이 몇 권 있는데, 그거 괜찮았던 기억입니다. 소네트, ㅎㅎㅎ 할 말 없네요. 그 책도 원문하고 같이 실려있었나봐요. 그래서 토막낸 거 아니라면 정말 양심불량이고요.
지금 읽고 있는 문지 책은 작가 연표까지 738쪽. 예전에 책들이 다 이랬는데 언제부턴가 출판사가 돈만 밝히기 시작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