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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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작가이긴 하지만 오히려 바로 유명세 때문에 정작 읽어보기를 차일피일하게 된 소설가. 이런 기분 아시지? 3년 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차일피일은 괜히 했네. 얼른 읽어볼 것을. 그러면서 한 구석으론, 책을 번역한 이윤기 선생이, ①내가 알기론 이태리 말을 한국말로 옮겨 책을 낼 만큼의 이태리어 실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②번역하는 분이 한국말로 글을 과하게 잘 쓰는 사람일 경우 오히려 원본을 손상시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어서 이윤기 번역서를 피하다보니 두 번째로 읽은 책이 <푸코의 진자>가 아닌 이태리어→한국어, 즉 직역과 동시에 적어도 진지한 번역인 것처럼 읽힌 <바우돌리노>가 됐으며, 세 번째 역시 직역(인줄 알았는데 암만해도 아닌 것 같음), 그리고 (다 읽고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보니)공을 많이 들여 번역작업에 임한 것이 틀림없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됐다. <푸코의 진자>를 다음에 읽으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로아나....>의 주석에 <푸코의 진자>와 겹치는 부분을 상세하게 콕 집어놔서 혹시 두 작품 사이에 뭔 관계가 있나 싶어서이지만, 솔직히 이윤기 번역이란 게 좀 맘에 걸린다. 아울러 그동안 외국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투철한 인식 아래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외국 번역시집 한 권은 꼭 읽어보려 한다. 누구냐 하면, 랭보. 에코가 진짜 시인이라고 은근히 강조했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난 책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책에 관심이 무지 많아서. 또 있다. 에드몽 로스탕이 쓴 <시라노>. 동명의 오페라가 원작의 거의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읽어본 듯한데 <로아나....>의 뒷부분이 온통 시라노와 로잔느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깔려 있어 마음 고쳐먹고 한 번 읽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밀리오 살가리가 쓴 <산도칸-몸프라쳄의 호랑이들>도. 이건 화자 ‘나’ 잠바티스타 보도니, 애칭으로 얌보의 유년시절에 감동을 받아 평생에 걸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소개한다. 위스망스의 소설 하나가 더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절판이다.
 문제는 돈 많은 고서적상 얌보가 술, 담배, 여자, 과다한 독서에 따른 운동부족(누구 하나를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거 같다)에 따른 고혈압으로 하루 날을 잡아 까무러친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물론 뒷목 부여잡고 어어… 하면서 자빠지는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까무러쳤는데 병원에서 서서히 회복하는 광경, 완전한 오리무중에 빠져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환경. 저 멀리서 어딘가,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얘기를 하고 난 대답을 하고,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이 골을 넣은 프랑스가 브라질에 3대 0으로 이겨 우승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자신이 낼 모래 환갑인 노년의 남자고, 동갑내기 심리학자 마누라 파올라와의 사이에 결혼한 두 딸, 세 손자들이 있다는 기억은 완벽하게 소거된 상태로 깨어난다.
 거 재밌겠다. 눈 떠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물럭거린단 말이지. 진짜 내 눈 앞의 다 늙어버린 여자가 30년 넘게 같이 산 아내란 말인가? 그렇기는커녕 난 결혼 생활이란 것이, 여자하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무슨 기분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안 물어볼 수가 없었겠지. “난 괜찮은 사람이었소?” 여자는 싱긋 웃고 말한다. “대체적으로 괜찮았어요. 유혹에 약한 걸 빼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 뒤로는 젊은 주부 두 명이 세 아이를 데리고 서 있다. 자식과 손자들이라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식이라면 자라면서 속도 썩히고 그랬을 테니까 기억하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손자 손녀들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까. 근데 기억나지 않는다. 퇴원 후 집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가장 친한, 친하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왔는데도 전혀 누군지 모르겠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짓궂은 농담을 해도. “어여쁜 시빌라한테 전화해봤어?” 뭐라고? 시빌라? 그게 누구?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 경우엔 심각하다. 여자 이름이라서. 아내가 말했었다. 유혹에는 약했다고.
 “아, 미안, 미안. 자네 고서적상점 아가씨야.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라서 남자라면 누구라도 다 한 번 쯤 마음속에서 간음하게 만들 정도지. 흔히 자네한테 지금처럼 놀리고 그랬네.”
 아, 미치겠다. 그걸 어떻게 믿어. 가게에서 하루 종일 둘이 같이 있었다면, 거기다가 내가 천성적으로 유혹에 약했다면 과연 그리 어여쁜 아가씨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몸이 조금 좋아진 거 같아 광장 한 바퀴 산책을 하는데 약간 나이든 티가 나는 젊은 여인 반나가 와서 얌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얌보, 얌보.”하면서 “나는 너에게 두고두고 아주 멋진 추억으로 남을 거야” 하는걸 보면 분명 이건 보통 사이가 아닌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다.
 사태가 심각함을 제대로 알아챈 심리학자이자 현명한 아내. 원래부터 얌보는 대학진학 이전까지 그가 주로 살던 솔라라(지역이자 저택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시절의 기억을 싹 지우고 살던 터. 비록 아주 촌이지만 공기도 좋고 얌보의 기억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내라고 거의 강권을 하다시피 한다.
 나, 지금 독후감 쓰면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한 거다. 주인공이 원래부터 청소년 시절까지의 기억을 지우고 살았다는 거. 그럼 혈압이 터져 자빠진 다음에 후유증으로 모든 기억을 소거하기 전에도 생애 일부분에 관해선 회로가 망가져 있었다는 중요한 설정.
 하여간 솔라라로 주거를 옮긴 얌보. 그는 그곳에서 열 살 가량 위인 청지기의 딸 아말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몇 달을 지내면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 시절, 또한 이탈리아 현대사의 질곡기桎梏期 한 가운데를 관통하던 시기에 있던 일을, 그의 할아버지가 수집해놓은 온갖 책, 잡지, 신문, 우표, 과자 깡통 등을 통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로아나 여왕의 놀라운 불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대목에서 “안 알려줌!”이 나와야 하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알려드리겠다. 만화책 제목.
 당연히 이렇게 쉽게 알려드리는 이유는, 그래봤자 <로아나....>가 만화책 제목이라는 걸 백번 얘기해도 절대 이 책의 프레임 비슷한 건 생각도 못할 것이기 때문. 소설의 절반 이상은 얌보 또는 에코의 소년시대에 읽은 책과 잡지, 만화책 같은 것들에 할애하고 있다. 근데 그걸 글쎄, 거의 다 사진을 찍어 삽화 비슷하게 보여준다는 말씀. 하여간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파시스트, 물론 ‘두체’라고 칭했던 무솔리니와 그 일당들을 찬양하는 노래 가사까지 다 나오니까 할 말 없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이 소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한다)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다 늙어 죽음의 침상에 누워 그땐 그랬고, 그때는 또 그랬지, 순간순간을 짚어가는 삽화소설일 수도 있고(삽화소설이라고 하는 게 더 비슷하겠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 순간, 우연히 조국의 불행한 현대사와 맞부딪힌 시절에 겪을 수밖에 없던 허구의 개인사를 보태 소설로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해드릴까? 글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중에서도 천수를 다 하고 돌아간 작가들의 경우에, 참 아쉽게도 마지막 작품은 전작들과 굳이 비교하면 눈썹을 휘날리는 경우가 그리 없기 때문에, 내가 읽기엔 참 좋았으나, 하여간 신중을 기해 선택하시란 사족을 달아야 나중에 핀잔을 덜 먹겠다 싶어서 말씀이야.

 읽으면서 제일 골 때리는 장면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하고 같이 자야하는 첫날 밤 침상 위에서 슬쩍 손을 대니까, 아내가 하시는 말씀이, “처음 날 알기 시작한 남자하고는 그걸 할 수 없어요.”라는 취지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 며칠 후 드디어 사랑의 행위를 마친 다음에 역시 아내가 하시는 말씀. “원 세상에,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예순 살 먹은 남편의 동정을 빼앗다니.” 아,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이게 진짜 유머 아냐? 여기에 남편께서 아내에게 화답하시는 말씀. “아예 안 하느니 늦게라도 하는 게 나은 법이죠.” 같은 장면에서 더 재미난 건, 일을 다 마친 후에 얌보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이제 사람들이 왜 그걸 밝히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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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9-1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세욱 님, 번역이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번역에 공들인 것은 알 수 있죠.
이 ‘로아나‘의 경우, 역주에 영문판이랑, 어디 다른 걸 참고했다고 자잘하게 나오더라구요.
그 수고를 알게 되니, 괜히 트집잡고 싶었던 마음이 ‘완전 무장 해제‘ 됐었습니다.

님의 리뷰로 다시 보게 되니, 완전 반가운 마음에~^^

Falstaff 2017-09-11 13:24   좋아요 0 | URL
예. 하여간 꼼꼼하게 시간 무척 많이 들여 공들여서 번역한 티가 나더라고요.
저도 정확한 번역 여부에 관해서는 깡통입니다만 ^^;

잠자냥 2017-09-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위스망스의 소설은 <거꾸로> 인가요? 전 미셸 우엘벡 <복종> 읽다가 위스망스 <거꾸로> 읽어봐야 겠구나 하고 검색해봤더니 절판이더라고요. 다행히 알라딘 중고에서 싼 가격에 거의 새 책을 구했습니다!

Falstaff 2017-09-11 13:25   좋아요 0 | URL
지금은 중고책도 별로 없더라고요. 다시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