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두박질 열린책들 세계문학 125
마이클 프레인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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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인이 66세 때 쓴 장편소설. 첫 장을 넘기면 감사의 말씀이 나온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프레인이 얼마나 많은 집단과 인물들에게 신세를 졌는지 근 두 쪽에 걸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있다. 이이가 고맙게 생각하는 면면을 보면 필요한 자료의 노웨어know-where를 제공해준 사람들, 미술 시장의 속성과 이것저것을 가르쳐준 사람들, 수도 없이 많은 도서관 사서들, 미술관과 미술 도서관원 일동에다가, 인쇄실 부실장, 미술관의 과학부 소속, 초상화 박물관에서 그림의 재료와 화법에 관해 얘기해준 사람(), 대학 지구과학부 고생태학 연구 센터의 교수, 네덜란드어, 독일어, 라틴어 해독을 해준 사람들, 오르텔리우스의 묘비명을 탁본해준 대학 사서들, 중세 역법曆法을 설명해준 이, 자기 회계사와 미술품 거래에 관한 재정적, 법률적 조언을 해준 또 다른 회계사, 원고를 읽고 잘못된 점을 수정해준 미술사학자, 성 베드로 성당에 관해 도움의 말을 해준 이, 그리고 모든 예술사가들에게 감사를 한다고 써놓았다. 이런 감사의 말씀을 읽고 나는 작품이 골 좀 아프겠다는 생각과, 잘 하면 에코의 명저 <장미의 이름>하고 비슷한 대박을 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동시에 품게 됐다.

  첫 장을 열고 제일 처음 읽은 것을 소개했으니, 책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읽은 것도 잠깐 소개한다. 다름 아닌 역자 최용준의 약력. 사무실 내 책상 저 앞에 째진 눈에 안경을 낀 심술궂은 얼굴의 뚱뚱한 부잣집 아들, 엔지니어 이름이 최용준인데 물론 그 아이는 아니고, 서울대학 천문학과(별 볼 일 있는 학과다!)에서 석사, 미시건 대학에서 역시 천문학 박사를 받았으며 현재 콜로라도에서 이온추진 엔진과 저온 플라즈마를 연구한다니 연구소에 있는 모양이다. 근데 씌어 있는 영문한글 번역서만 아홉 편이고, 열린책들, 샘터, 시공사의 소설 시리즈를 기획하기도 한 막강신공의 소유자다. 한 가지만 제대로 하기도 힘든 세상에 참 다양한 방면으로 잘 하는 인간인가보다.

  역자의 다양한 이력을 굳이 써놓은 이유는, 네덜란드 역사와 회화, 미술사, 일반 세계사 및 미술품의 유통과 세무, 특정화가pointed painter 피터 브뢰겔에 대한 전기적 지식까지 참으로 다양한 방면을 한국말로 번역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문장으로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다(물론 번역상 오류에 관해선 전혀 모름). 도대체 이 양반, 못하는 게 뭐야? 전부 다 잘한다는 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거하고 같은 말이란 옛 성현의 말씀, 다 헛소리였나?

  또 서론이 길다.

  영국의 젊은 부부, 철학자 마틴과 미술사가 케이트 클레이가 젖먹이 딸 틸다와 함께 스코틀랜드 깡촌에 있는 별장으로 봄을 나기 위해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웃 저택에 나이 먹은 남편과 젊은 아내(분명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겠지?)가 이들이 도착하는 바로 그날 자신들의 저택으로 초대를 해 가게 됐는데, 그 집에서 트로이 전쟁을 유발시킨 헬레나의 유괴를 그린 대형 그림과, 브뢰겔이 그렸다고 미술사가가 아닌 철학자 마틴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풍속도 하나를 보게된다. 물론 다른 그림도 두어 개 더 보지만 부부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문제는 저택의 부부가 워낙 무식하고 돈만 밝히는데다가 세금을 제대로 낼 의향이 완벽하게 없다는 거 하나, 헬레나를 그린 그림을 대단히 높은 가격이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반면 철학자가 브뢰겔이 그린 보물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하는 그림은 굴뚝 먼지 방지를 위해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거 하나, 마틴이 헬레나 그림을 세금 안 내는 야매로 팔아주기 바라며 수수료로 그림 값의 5.5%를 주겠다고 제의하는데 반하여 마틴은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 브뤼겔의 그림을 헐값에 넘겨받기 원한다는 거 하나. 이렇게 세 개가 크게 말해 소설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여기에 두 부부가 만났으니 어찌 교통사고가 없겠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장면 또한 여지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책의 상당한 부분이 브라반트, 플랑드르, 즉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부지역을 스페인이 점령하여 엄혹하게 수탈하고 인민들을 살상했던 지옥의 16세기 중반의 역사를, 브뤼겔의 그림을 통해 조명하는데 할애한다. 그래서? 여차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

  위에서 얘기한 세 개의 동력으로 사실 책의 내용은 다 말한 거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시기가 1999. 세기말의 와중에 감히 해피 엔드를 기대할 수는 없고, 분명히 책의 제목처럼 누군가가 곤두박질, 아니 누군가 또는 다수가 곤두박질을 치고 난 다음에야 끝날 것인데 제목부터 내놓고 <곤두박질>로 해놓아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곤두박질을 치게 될까를 기대하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지만 당시 66세의 저명한 작가였던 프레인이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책은 미리 내용을 말해주면 정말 재미없다. 철학자 남편이 아주 제대로 사고를 치는 걸 옆에서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것도 자기가 전공인 분야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철학자 혼자 온갖 상상을 해가며 난장판을 바라보는 아내 심정이. 난 읽는 내내 이게 제일 궁금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우리의 철학자 마틴 클레이에게, 어이 젊은이, 똑바로 가야 해. 정직하게 똑바로 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라고 쓸데없고 꼰대 같은 말을 쉼 없이, 가끔은 나까지 괜히 초조해지는 걸 알아채면서 중얼대고 말았다. 역시 인생은 조금 손해를 보는 거 같아도 똑바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아스팔트에 곤두박질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대박은 아니고 중박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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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9-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내 책상 저 앞에 째진 눈에 안경을 낀 심술궂은 얼굴의 뚱뚱한 부잣집 아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상이 가서 그만 웃음을 멈출 수 없는ㅋㅋ

Falstaff 2017-09-04 15:11   좋아요 0 | URL
연애상대로는 개떡이지만 평생 델꼬 살긴 좋을 거예요.
여름마다 *******************, 겨울마다 *************, 직장생활은 완전 취미생활에다가 ㅋㅋㅋ 생각만 해도 진짜 왔다예요. ^^;

* 암만해도 혹시 이 글을 친척이라도 읽으면 또 사이버 모욕죄로 고소하겠다느니 운운할까봐 누군지 눈치 챌 수 있을 최소한의 것은 ‘****‘로 수정했습죠. 세상 겁나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