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은 뱀 펭귄클래식 125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세번째 읽은 모리아크. 대한민국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 근데, 이 책 정말 좋다. 완전 내 스타일이다. 아, 읽고나서 나, 맛 갔다. 초장에 말하노니 여기까지 읽고 덥석 미끼 물지 마시라. 당신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 노인 이야기. 책을 넘겨 본문이 나오기 전에 처음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옮겨본다.


 "가족이라는 이 원수, 증오와 탐욕에 갉아 먹힌 이 마음, 이 비천한 마음을 당신들은 불쌍히 여겨주기 바라오. 이 비참한 마음이 오히려 당신들의 온정을 끌어당기기를 원하는 거요. 지리멸렬한 인생 내내 그 슬픈 정열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빛을 쫓아버리곤 했었지. 어쩌면 그 빛이 이 마음을 어루만지고 불타오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그 마음을 감시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이들은 실체 없는 범상한 기독교인들이었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진리의 빛이 더 이상 밝아오지 못하도록 항해하는지!"


 위 인용문, 한글로 씌여진 이 글(좋은 문장은 아닐지언정 그건 번역한 사람의 책임이지 모리아크 잘못은 아니다)을 읽자마자 뻥, 대책없이 다가오는 당혹과 동의. 가족이라는 원수, 증오와 탐욕. 가족 내에서 구성원 간에 가할 수 있는 심리적 폭력. 전혀 소설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넘쳐나는 호기심이라니. 모리아크라면 잘난 척하는 남편에게 비소를 탄 음식을 먹여 독살을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며(떼레즈 데케루), 호텔방을 전전하면서 혼자 힘으로 자란 딸의 방문을 안 그런 척하며 애타게 기다릴 수도 있다(밤의 종말). 이 책에선 가족간의 갈등과 상처주기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아, 이 궁금증을 어찌할꼬. 어찌하긴 뭘 어찌해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기만 하면 될 것을.

 평민 출신의 무지하게 머리 좋은 나, 루이는 적어도 법원 안에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신화를 일군 변호사. 프랑스 최고의 변호사 수가(酬價: 보수로 주는 대가)임에도 의뢰인들이 종로 5가 광장시장 부터 서대문 로터리까지 줄을 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스스로도 전력을 다 하여 의뢰인들을 승소를 위해 날밤 새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변호사 개업 30년 만에 무지막지한 돈을 벌어들였다. 무지막지해도 정말 무지막지하게 무지막지한 돈을. 명색이 변호사라 거침없이 돈세탁의 모든 기법을 휘황찬란하게 선보이면서 유럽 거의 모든 나라 은행의 비밀금고 안에 금괴와 현금의 형태로 고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 즉 지능이 발달한 것과 현명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누구나가 갈구하는 행복, 그걸 찾는 일에 결정적으로 실패한 루이 선생. 로스쿨 수석일지언정 결혼을 하자마자 급속하게 발생한 아내와의 갈등이 세상에서 자기 경우에 국한한 일이라고 속단한 루이, 급기야 첫 아이를 낳자마자 아내의 모든 총기가 아이에게로만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를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해버린다. 그래서 루이의 모든 열정은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집에서 만족시키지 못하는 성적 갈증을 밖에서 해소하는 일에 바쳐진다.

 근데, 여태 얘기한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이제 다 늙어 변호사업도 은퇴하고 심장병까지 도져 오늘 낼 하는 루이가 가족, 특히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다음에 읽어보라고 쓰기 시작한 편지 속에 들어 있는 거다. 프랑스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칼레즈(검색해도 안 나온다)의 거부(첫째가 장자요, 둘째가 거부고 셋째가 이인데 화수분이지요, 할 때 그 거부)가 이제 다 죽을 단계에 돌입해 집안엔 아들, 딸 내외, 손자 손녀 내외, 어린 증손녀까지 몽땅 다 모여, 우리 아빠, 우리 할아버지 언제 죽나, 이거에만 모든 관심을 맞추고 있다. 아, 또 하나. 나한텐 국물이 얼마나 떨어질까, 하는 거하고. 심지어 처자식들은 이 영감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돈을 갖고 있는 노인네다.

 문제는 벌써 한 40여 년 전부터 처자식이 한 편을 먹고 노인 혼자 따돌림을 당했다는 거. 자신이 벌어온 돈으로 먹고, 자고, 싸고, 입고, 배우고, 시집 장가가고, 즐겼으면서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만 해도 수백가지를 댈 수 있는 노인, 루이. 그에게 가족 구성원이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에게 온 힘을 다해 상처를 입히기만 하는 원수, 증오의 대상이자 결코 화해하고 싶지 않은 이물질들이다. 그리하여 '나' 루이는 이제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최선을 다해 아내와 아이들과 자손들에게 경멸과 조롱과 빈 손을 선사하느라, 진짜로 죽을 힘을 써서 편지를 써내려 간다. 길고 긴 편지.

 위 문단의 첫 문장을 다시 반복한다. 문제는 노인 혼자 따돌림을 당했다는 거. 이렇게 믿고 있다는 거. 가족간에 애정을 느낄 아무런 이유를 노인은 갖고 있지못해 자신의 모든 유동자산은 결코 이들에게, 처자식과 자손들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럼 기부? 천만의 말씀. 기부를 하려면 고심해서 결행했던 온갖 방법의 돈세탁을 거꾸로 다 까발려야 하는데 명백한 범죄행위를 존경받는 변호사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어떻게 중인환시리에 밝힐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오늘 낼 하는 심장병 환자의 몸으로 일찌기 자신이 만들어낸 사생아를 찾아 파리로 여행을 떠나는데, 과연 그에게 어마어마하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몽땅 다 줄 수 있을까? 힌트는, 명석한 사람도 언제나 명석한 후손을 생산하는 건 아니라는 진실.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 평생 자신이 가족에게 가했던 비폭력적인 폭력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가족들의 비폭력적인 폭력에만 몰두하여 가족을 원수, 증오와 탐욕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로 규정한 불쌍한 노인. 아, 이 부르주아 노인같이 자기만 아는 인간을 불쌍하다고 하면 이거 또 개박살나는 거 아닌지 몰라. 좋다, 글로 쓴 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쓴 건 내가 책임진다. 자기만 아는 부르주아 늙은이라도 불쌍한 건 불쌍한 거다.

 과연 아집과 악의로 단단하게 뭉쳐진 노인 루이는 세상과 화해를 하고 숨을 거두었을까? 노벨상 수상작가의 소설에서 말이지. 그랬다면 어떻게 그랬을까? 궁금하셔?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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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사막> 읽고 완전 반해서 그 뒤로 펭귄에서 나온 이 사람 작품은 올클리어!! ㅎㅎ 좋은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Falstaff 2017-08-02 10:12   좋아요 0 | URL
앗, 저도 4분기엔 <사랑의 사막>을 읽어봐야겠습니닷!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