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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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열 서너 페이지 읽으면 단박에 눈치 딱 때릴 수 있다. 신문연재 소설. 각 절節이 두쪽 조금 넘는 분량에서 절대로 많이 왔다갔다 안 한다.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과지성사 편집으로 370쪽, 현암사 편집으로 414쪽, 전부가 다, 몽땅, 딱 이런 분량의 백 수십개의 절로 되어있다. 어려서 신문보면 항상 아랫면에 달려있던 연재소설 보는 재미를 빼지 않았을 때부터 월간도 아니고 매일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궁금해했다. 일정 분량에서 더하기 빼기 원고지 한 장 가량으로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고한 날 똑같은 긴장을 갖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거, 거 참. 하긴 80년대까지 우리나라 장편소설의 대부분은 신문연재를 마친 원고를 다시 편집, 퇴고, 기타등등을 거쳐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긴 했다.

 이 책은 네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벗 / 형 / 돌아와서 / 번뇌. 첫 장 '벗'을 보면 오사카로 놀러간 책의 화자 나가노 지로가 젊은 시절 집의 서생이었던 오카다의 집에서, 오사카에서 가까운 산에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던 벗 미사와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속한 날이 와도 미사와는 도착하지 않고 조금 늦겠다는 엽서만 도착해 좀 께름칙한 상황, 드디어 연락이 왔다. 오사카에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평소 좋지 않았던 위에 탈이 나 병원에 입원해 있다나? 옛 서생 오카다의 집을 나와 병원에 가보니 그새 옆 병실에 입원한 게이샤하고 벗 미사와는 벌써 모종의 인연이 있었던 거다. 거참. 이 인연이 뭔지 궁금하시지? 별거 아님. 필름 돌아가면 다시는 해당 게이샤는 등장하지 않으니 신경 끄는 것이 좋다. 분량이 좀 길지만 이거 보다 책 전편에 걸쳐 혹시 뭔 인연이 없을까? 이거 복선 아냐? 라고 짐작을 하게끔 만드는 일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 미사와가 사랑했던 한 여인. 이혼당하고 본가에도 들어가지 못해, 중매를 섰던 미사와의 아버지 집에서 기숙했던, 정신이 좀 왔다갔다 하던 젊은 여인. 미사와가 외출이라도 하면 언제나, 한번도 빼지 않고 대문까지 쫓아나와 '나갔다가 일찍 돌아오셔요' 당부하던.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걸로 끝이 아니라 이 미사와 놈이 여인이 죽은 다음에 죽은 시체의 이마에다 대로 키스까지 했다네, 참나.

 정신이 이상한 여인이 미사와를 사랑했을까? 하는 고민, 글쎄 고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사숙고를 누가 하느냐 하면 '나' 나가노 지로가 아니고 '나'의 형 나가노 이치로가 한다. 이치로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당시 일본 최고 지성인의 하나로 대학에서 철학인지 뭔지를 가르치고 있는 대단한 수재. 그럼 행복할 거 같지? 천만에. 하루는 동생을 불러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암만해도 내 마누라 나오가 너한테 반한 거 같은데, 아버지를 닮은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너는 아닌 줄 알겠다. 하지만 나오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나오하고 너하고 짧게 길을 떠나 여관에 들어 하루 밤을 새우고 와라. 글쎄 정말이라니까.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는 이 책에서 중심이 뭘까? 미사와와 죽은 여인의 사랑, 이치로와 아내와 지로의 삼각관계.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난데없이 <디미니의 프란체스카> 생각이 벌떡 들게 된다. 단테의 <신곡> 1권, 지옥편에서 거의 제일 앞대가리에 나오는 불타는 지옥불 장면. 베르길리우스와 단테가 본격적으로 지옥 구경에 나설 때 첫빠따로 보는 광경이 "제일 불행핼 때 제일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보다 불행한 건 없다" 아우성치는 젊은 남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다들 아다시피, 프란체스카의 남편 란체오토 말라테스타가 암만봐도 미남 동생 파올로하고 마누라가 뜨거운 관계인 거 같아 증거를 잡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고 거짓말을 꾸며 전 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살짝 돌아와보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두 잡년놈들이 귀네비어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흥분, 그만 서로 막 더듬기 시작하는 걸 눈으로 봐버린다. 그리하여 그걸 본 눈알이 확 뒤집어져 허리에서 긴 칼을 꺼내 단칼에 허리를 두 동강 내 죽여버린 사건. 난 이 장면이 머리 속에서 제일 먼저 확 떠오르며 이 작품이 결국 이 비슷한 비극으로 끝나고야 말겠구나, 짐작을 했다(책 속에서도 이치로의 입을 통해 이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나처럼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아직까지 화자 '나' 지로와 형수 '나오' 사이의 러브라인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까짓 거야 작가가 마음 먹으면 한 시간 안에라도 벌써 불씨 튕겨 황소라도 한 마리 잡아먹고 남게 만들 수 있는 거니까.

 형으로부터 이런 지시 또는 부탁을 받은 지로는 어떻게 했을까? 1913년. 이 책이 나온 시기인데, 설마 시동생하고의 불륜을, 남편의 권고로 만들어내는 여인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시겠지? 지로는 거절한다.

 여기까지가 2장 까지 내용. 근데 3장, 4장으로 진입하면 또다른 주제가 등장해버린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장편소설의 경우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제가 진짜 주제. 이걸 여기서 얘기해야하나? 마지막 주제가 진짜 주제라는 말도 괜히 한 거 같은데 말씀이야. 그게 진짜 주제면 1장과 2장에서 나오는 흥미진진한, 흥미진진할 거 같은 주제는 다 구라야? 아이고, 입 간지러워.

 하여간 소세키, 이야기는 정말 잘 만들어낸다. 비록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나쓰메 소세키답게 부르주아 인텔리겐챠를 위한 그들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참 흥미를 자아내는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걸 또 이리저리 얽어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로 이어가는 거. 근데,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않을 거 같다. 물론 당시에 했던 문명비판이 오늘날까지 유효하긴 하지만 좀 진부하거든. 물론 내 생각에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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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키는 신문연재때문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감이 없잖아 있는데 ㅎㅎ 그게 또 그냥 잘 읽힌단 말이죠. 암튼 이 사람은 별것아닌 이야기를 길게 잘 풀어놓는 재주만큼은 매우 빼어난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7-07-24 11: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옙. 그래 앞에서 열라 했던 이야기가 뒤에선 전혀 안 나오는 재미난 경우도 그렇고요. 소세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의 작품을 이리 많이 읽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런가봐요. ㅋㅋㅋ

han22598 2023-08-17 0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팬은 아니지만 많이 읽으셨단 말씀이죠? ㅎㅎㅎ

Falstaff 2023-08-17 05:55   좋아요 0 | URL
옙. 팬 까지는 아닙니다. 책은 좀 읽었습지요. ㅎㅎㅎ
저는 겐자부로 팬입니다. 요새 새 책이 나와 다음 달에 읽을 거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