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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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이틀 헨리 제임스를 읽었다.

 무대는 19세기 전반기. 내용으로 짐작해서 1840년대 쯤. 이때 우리의 주인공인 의사 선생 슬로퍼 씨가 한 50세 정도. 온 뉴욕이 알아줄 만한 명의로 이름이 높아 사회적으로 거의 완벽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저 옛적 히포크라테스도 자기 환자를 100% 다 살려낸 것은 아니듯 슬로퍼 선생도 무수하게 많은 인명을 구했으나 훌륭하게 키우기로 작정했던 맏아들과 연 1만 달러, 지금 시세로 100만 달러라는 주석이 붙어있는 돈을 지참금으로 가져온 절세 미녀 아내를 저 세상을 보내야 했던 슬픈 과거를 가진 인물. 잘 보시라. 연 1만 달러. 당시 초간된 많은 소설책을 보면 유럽과 아메리카 공히 4%의 이자율을 보인다. 이걸 감안하면 먼저 간 아내의 지참금(주식 등의 유가증권을 다 포함해서)을 현금의 현재가치로 계산하면 25만 달러. 지금 시세로 2,500만 달러, 대강 계산해서 270억 원을 가지고 시집 왔다는 얘기. 말이 270억 원이지 19세기 중반 현금의 구매력을 감안하면 지금 돈 500억 원은 간단하게 넘어설 거다.

 글쎄. 이거 진실이야? 헨리 제임스가 썼으니 적어도 객관적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긴 하다. 근데 당시 유럽에선 의사라는 직업은 미국에서 만큼은 존경받지 못하는, 우리 조선시대 개념으로 하자면 그냥 중인계급 중에서 좀 윗길 정도. 근데 실리, 공리주의를 높이 받들었던 미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나보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보바리 여사의 남편이자 멍청한 시골의사 샤를르가 생각났다) 슬로퍼 씨는 자존심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아내의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무려 연 3만 달러의 재산을 일궜던 것이다. 현금의 현재가치로 75만 달러. 지금 시세로 7,5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850억 원가량. 구매력 감안하면 1,500억 원 수준. 이 양반, 강남에서 잘 나가는 성형외과 개업한 사람 아니다. 외과와 내과, 특히 내과 전문의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명의로 이름이 났었겠는가.

 이렇게 똑 소리나게 머리좋은 의사가 30년 가량 의사를 했더니 자신도 모르게 사람 관상을 보는데 도가 터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는지 생각해보면 수긍이 간다. 기본적으로 지능지수가 높은 인간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맏아들과 아내를 먼저 보낸 이이에게 딸 아이, 캐서린이 하나 남았는데, 슬로퍼 씨가 냉정하게 관찰을 해보니 똑똑한 것도 아니고 상냥한 것도 아니고 19세기 여인의 최고의 미덕인 어여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화장과 의상 또는 예술품에 관한 미적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무지하게 건강한 체질을 타고 났다는 거. 19세기 소설에 앞에서 열거한 조건을 가진 여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캐서린 점점 자라 19세 되매, 고종사촌의 약혼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에 과부이자 작은 고모이며 동거인이기도 한데다 나중엔 일종의 어지럽기만 한 보호자 연하기까지 하는 페니먼 부인과 함께 참석을 하는데, 거기서 정말 아름답기 짝이 없는 미모의 젊은 남자 모리스를 만나 그만 찌리리릿, 전기가 통하는 걸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모리스, 정말 아름다운 남자라고 헨리 제임스가 책 속에서 숱하게 적어놓는 걸 보고, 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표지가 바로 모리스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그림을 하나 골라 올린 것이구나,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어이없게 그림은 러시아의 유명화가 일리야 레핀의 자화상이다. 낄낄낄. 내가 왜 웃냐하면, 만일 표지 그림을 정말 모리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거라면 레핀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겠기에. 왜냐하면 모리스가 만일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다면 니콜라이 로스토프 같은 인간이었기 십상이기 때문(<전쟁과 평화> 참조). 하긴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 모리스는 총명하고 잘 생긴데다가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줄도 알고, 대화할 때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침착성까지 모두 갖춘 이기주의자 게으름뱅이이긴 하다. 자신이 상속받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은 여행과 방랑과 기타등등으로 탕진하고 지금은 아이 다섯 달린 누나네 집에서 누나한테 용돈을 뜯어내 반짝반짝한 구두와 칼 같은 주름이 진 바지, 깔끔한 쟈켓으로 치장하고는, 자신의 행복한 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캐서린을 발견했고.

 주인공 세 명을 다 소개했다. 워낙 좋은 머리를 타고난 의사선생은 모리스를 척, 한 번 보자마자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고 그래서 이어지는 갈등구조. 19세기 중엽에 벌어지는 시대극이자 사회극. 간단하게 말해서 헨리 제임스의 전공과목. 순진녀와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액의 재산을 겨냥한 이기주의자 게으름뱅이의 연합전선에 홀로 맞선 혜안의 아버지. 정말 통속적으로 흥미진진. 불타는 사랑과 이성적 방해의 한 판 승부,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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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13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 소설 가운데 전 이 작품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여주인공 캐릭터도 나름 독특하고 ㅋㅋㅋㅋ 헨리 제임스가 3인칭 전지적작가 시점을 적절하게 잘 활용했다고나 할까요. ㅎㅎ

Falstaff 2017-07-13 10:5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어요? 전 <여인의 초상>이 재미있더라고요. 당분간 헨리 제임스는 안 읽을 거 같아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