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헨리 제임스를 몇 작품이나 읽었더라? <한 여인의 초상>과 <나사의 회전>이 (앞의 것은)재미있었고, (뒤 것은)엽기적이라 기억에 남는다. 이거? <데이지 밀러>? 중편 소설 분량. 헨리 제임스의 작품 가운데 제일 많이 팔렸다는 베스트 셀러. 베스트 셀러가 언제나 베스트 작품은 아니라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 참 웃겨. 몇 번 얘기한 거 같은 바, 앞뒤 따지지 말고 얘기하자면, 유럽에서 먹고 살기 팍팍해 배타고 건너온 사람들을 선조로 둔 아메리칸들. 대륙에 나라를 건설하자마자 최고의 가치는 인권과 평등. 물론 유럽 백인 출신들에 국한한 인권과 평등. 어쨌거나 그들의 최고 가치는 실용주의다. 대륙의 무한한 자원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달러의 위세가 세상을 흔들기 시작할 즈음, 미국 부르주아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낸다. 전체 인구의 1/50,000 , 얘네들이 뭐 했을 거 같은가. 유럽 귀족들의 풍속을 그대로 카피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본데 없는 것들이라고 하면 너무 야박한 거고, 본토 즉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언제나 동경해마지않던 유럽 귀족들보다 오히려 더 완고하고 보수적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용하는 규범을 만들어낸다. 당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종족이 바로 미국 동부에 서로 모여 살던 백인 부르주아들이다. 이런 부류가 제일 한심하게 바라보는 족속이 있으니 자신들 바로 아래에서 자기들 역시 부르주아 계층에 진입했노라고 소위 '척'하는 인간들. 가소로운 것이지 뭐. 이거 진짜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나온 소설책에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족속들이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극소수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이따위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읎다.

 무척 아름다운 열 아홉살 아가씨, 데이지 밀러가 스위스 휴양지 브베의 한 호텔에서 주인공 프레드릭 윈터본의 눈에 띄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척보니 날마다 별만 올려다보고 사는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순진무구하며 예쁘기 그지 없는데, 이미 세상물정에 관해선 좀 아는 윈터본의 눈에는 데이지가 발랄하고 거침없는 것이 여지없이 바람둥이 기질이 보이는 거다. 한 마디로 자유분방해 19세기 중반의 규범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행을 서슴지 않는 것이 또 매력적이고. 대개 소설을 비롯한 드라마, 영화, 오페라 등의 남녀관계는 거의 한 번 딱 보고 숨넘어가게 사랑에 빠지는 것. 그러나 현명한 윈터본 씨는 데이지가 마음에는 들지만 홀딱 빠져 너죽고 나죽자의 참경에까진 도달하지 않는다.

 왜?

 윈터본은 미국 동부, 그것도 한때 미국의 수도였던 뉴욕에 기반을 둔 대 부르주아 가문이고, 데이지 밀러가 속한 밀러 가문은 뉴욕의 옆구리 스키넥터디에서 사업을 해 자신들도 부르주아 족속의 일원인줄 착각하고 있는 인간종이기 때문. 실제로 윈터본의 숙모 코스텔로 부인은 이렇게 단언한다.

 "그 사람들은 아주 천박해. 그런 부류의 미국인들은 절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란다." (78쪽)

 헨리 제임스가 제일 막강한 실력을 뽐내는 것이 바로 풍속소설. <아메리칸>에선 돈 많은 정의파 미국남자를 내세워 전 유럽의 귀족들을 물리쳤으며, <한 여인의 초상>에서도 역시 이모부 잘 만나 떼돈을 상속받은 여인의 자유분방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으니, 이 작품에서도 코스텔로 아주머니를 비롯한 일단의 미국 부르주아들의 엄혹한 견제를 모른 척하고 프레데릭 윈터본과 데이지 밀러가 세기의 사랑을 이루어내겠구나, 하고 김칫국 먼저 마셔두었다는 걸 고백한다.

 원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데이지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로하여금 발정나게 할 정도의 미모를 갖춘 여자들은 조금쯤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이가 세상의 많은 남자들을 저울에 올려두고 자신에게 제일 풍족한 복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젊은 미남을 고르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 있어? 세상의 모든 포유류 암컷이 하는대로 하겠다는데. 난 절대 반대 안 함.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

 하.지.만.

 명색이 헨리 제임스. 나 따위 변방의 독자가 생각하는대로 소설을 쓰면 일찍이 19세기를 떠르르하게 만든 헨리 제임스겠느냐, 하는 점. 내 생각은 여지없이 망가지고 소설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다 어느덧 스위스 브베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장소를 옮긴다. 여기서도 아름다운 데이지 아가씨는 로마 최고의 미남자를 골라, 세상의 가장 똑똑한 미녀들이 하는 짓, 줄듯 말듯 하는 거. 뭘 줄듯 말듯 하냐고? 순정. 마음 말이다, 마음. 마음을 줄듯 말듯 온갖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건데, 소설이란 건 여지없이 최상의 우연을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 밀러 가문 최대의 적수, 코스텔로 아주머니 역시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로 오고, 아주머니를 따라 윈터본, 원래 겨울에 나서 윈터본인줄 모르겠는데 하여간 원터본 씨도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에 도착, 데이지 양과 재회하면서 소설은 급커브를 튼다.

 재밌겠지?

 난 아무리 재밌어도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가 <데이지 밀러>를 그리 아꼈다 하더라도 그건 19세기 일이고, 아직까지 이 책의 효용이 가슴팍에 팍!  와닿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어찌하여 이리 황당한 끝맺음이 있겠느냐 하는 거. 어떻게 황당하냐를 말씀드리면, 내가 아무리 말려도 읽어보실 분은 책을 읽어보실 거라 미리 알면 재미 없고 재수도 없을 터라 언급할 수 없다.

 책의 3장에 벌써 로마에 가 있던 코스텔로 아주머니가 윈터본에게 편지를 써서 셰르뷜리에의 재미있는 소설 『폴 메레』를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103쪽에 나온다. 여기서 셰르뵐리에라는 스위스 소설가가 진짜 있었고 <폴 메레>라느 소설도 정말 있었다 한다. 책 뒤편의 후주를 보면 <폴 메레>의 대강의 줄거리가 나온다. 그거하고 <데이지 밀러>하고 어쩜 그리 비슷한지. 이 정도면 내 수준의 힌트는 다 드린 셈이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고 안 그러실 분은 맘대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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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긴 한데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가 훨씬 낫죠. ㅎㅎ 암튼 <데이지 밀러>는 짧아서 베스트 셀러가 아닐지 ㅋㅋㅋㅋ

Falstaff 2017-07-12 10:59   좋아요 0 | URL
윽! <순수의 시대>에선 영국인가 하여간 유럽에서 온 늙고 가난하고 조그마한데다가 비쩍 마른 남작한테 미국 부르주아들이 온갖 환대하는 묘사가, 으...
ㅎㅎㅎ 그 책도 진짜 WASP 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누가 그러더라, 하여간 이렇게 말하는 게 기억나네요.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신사가 등장하지 않아서 싫어요.˝
ㅋㅋ 전 화장실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거 같은 신사숙녀만 등장하는 <순수의 시대>가 별로던데요. 전 헨리 제임스도 <한 여인의 초상> 말고는 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워튼이나 제임스, 가까이 하기엔 시대 차이가 너무 나는 듯해요. ㅠㅠ

잠자냥 2017-07-1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속물스러움의 묘사를 지겨우리만치 참 잘도 했다는 점에서 ㅋㅋㅋ 높이 샀어요. 전 빅토리아 시대 때 이야기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미국의 저 시절 부르주아 이야기도 읽긴 읽되, 별 감흥이 없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를 대표작으로 많이 꼽던데 전 그 작품 보다는 <이선프롬>을 가장 좋아합니다. ㅎㅎ

Falstaff 2017-07-12 12: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워튼이 그 계급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허위를 사정없이 비튼 건 맘에 들더군요. ㅎㅎㅎ
<이선프롬>, 나중에 기억나면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만, 워튼하고는 당분간 별거생활 중이라 언제가 될지는 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