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그림자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1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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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콩쿠르상 수상작. 본문만 224쪽의 얇은 책. 만만하게 봤다가 코피 터진 책.

 첫 문장.

 "수탉의 울음 소리, 새벽, 개 짖는 소리, 밝아오는 아침, 잠이 깨어 일어나는 사람, 자연, 시간, 꿈, 명료한 의식, 이 모두가 가차없는 것들이다."

 첫 문장부터 오리무중. 문장은 멋있지만 도대체 주장하고 있는 바를 알지 못하겠다. 올바른 해석을 위해 네이버 국어사전을 열었다. (이게 뭐야, 책 읽으면서 첫 문장부터 사전을 열게 하다니!)


 가차假借 : ① 정하지 않고 잠시만 빌리는 것. '임시로 빌림'으로 순화, ② 사정을 보아줌, ③ <언어> 한자 육서(六書)의 하나. 어떤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없을 때 음이 같은...어쩌구저쩌구...


 위 문장에서 '이 모두가 가차없는 것들이다'라고 하면 사전에서 두번째 뜻일 거다. 그럼 다시 써보자.

 "수탉의 울음 소리, 새벽, 개 짖는 소리, 밝아오는 아침, 잠이 깨어 일어나는 사람, 자연, 시간, 꿈, 명료한 의식, 이 모두가 사정을 안 보아주는 것들이다."

 에이 썅. 무슨 뜻이야 이거.


 좋아. 첫 문장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넘어가고 다음, 두번째 문장.

 "어떤 책들의 알록달록한 표지에 손이 닿으면 언제나 내 마음 속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이 복받쳐온다."

 작가한테 특정한 책 한 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만질 때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울컥하는 책. 뭐 그럴 수 있겠지. 근데 정말로 책 표지를 만지면 마음 속의 "고통"이 복받쳐? 그럼 버리면 될 것을 왜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지? 당신한테 그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 난 별로 관심 없고, 지금 당장 당신이 쓴 책을 읽으며 내 마음 속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이 복받쳐온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장면이 아주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데, 얼마나 어린 시절이냐 하면,

 "내가 아직 말을 못하던 그 시기가 떠오르자, 불현듯 목이 메어온다. 그 시기는 내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다른 세계를 감추고 있다. 일종의 소리 없는 흐느낌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 이거 또 뭐야. 아직 말을 하지 못하던 시기를 기억한다고? 깜짝 놀라 각주를 보니 이렇게 써있다.

 "키냐르는 18개월 때 자폐증으로 언어 습득과 먹기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만 두살 이전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거다.

 이 사람 참. 좋아, 작가가 소설 형식을 통해 어떤 말을 못하겠어.


 근데 책을 읽어가며 곤란한 점은, 아주 짧은 단편斷片으로 이루어진다는 거. 니체의 일부 저작을 읽는 것같은 느낌. 쉬운 말로 하자면 저 위에서 한 번 쓴 단어. 오리무중. 책의 제 3장의 전문(全文)을 옮겨보겠다.



 제 3장

 

 스스로 자신의 제삼자가 되는 일은 언어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들 내부의 진짜 화자(話者)가 누구인지를 안다. 진짜 화자는 표현 방식이다.

 내가 하는 일이란, 힘겹고pesant, 생각으로 하고pensant, 몸을 굽히고penchant, 언어 자체는 사용하지 않고depensant, 언어로 하는 작업이다.



 제 3장을 읽고 내가 절절하게 느낀 건, 이 책은 프랑스인, 아니면 적어도 불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아서 행간의 뜻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매력을 느끼겠다는 거. 그러려면 적어도 번역본을 읽고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거 같다. 다시 한 번 보시라. pesant, pensant, penchant, depensant의 수열적 나열. 그런데 이걸 한글로 읽으면 "내가 하는 일이란 힘겹고, 생각으로 하고, 몸을 굽히고, 언어자체는 사용하지 않고, 언어로 하는 작업" 정말 무슨 뜻인줄 아시겠어? 이 책 다 읽고 감격했다고 말 하시겠어?


 오리무중 속을 헤매면, 헤매다가 어느 순간 작가가 주장하는 바를 코끼리를 장님이 더듬듯 감각은 할 수 있는데, 아, 나 이런 거 싫다. 물론 키냐르를 읽어보고 싫다고 하면 현대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한 감각의 소유자가 되겠지만 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 이런 소설을 쓰는 일도 물론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걸 인정한다. 그러나 나한테 키냐르는 이 한 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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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6-2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아주 깊이x1000 공감합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17-06-23 15:16   좋아요 0 | URL
이거 나이제한 해서 판매해야 합니다. 일정 이상 연령이 읽으면 뇌졸중 유발 위험이 크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