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의 시 219
황유원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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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은 사고보니 2015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책이란다. 자기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낸 첫번째 시집으로 떠르르한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으니 얼마나 째졌을까? 좋겠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고 이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이 김수영의 그것들과 닮았다고 생각하면 오산. 글쎄, 옛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라면 그의 시적 성과를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가 쓴 시집에 계관을 씌워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 마시라. 그냥 잘 쓰면 주는 거지 꼭 김수영같이 쓸 필요는 없다. 그럼 동인 문학상을 받을 작가는 만날 배따라기나 노래하고 벌판에서 감자나 캐고 있어야 하나? 그냥 잘 쓰는 시인, 소설가한테 상 주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민음사가 주관하는 김수영 문학상의 선정위원들, 물론 이름만 대면 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쟁쟁한 사람들일 것인데, 시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가 분명하겠지만, 쟁쟁한 이들의 추천의 변을, 독자가 상을 수상한 시집을 통해 체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책을 읽고난 후 감상을 한 마디로 하자면, "한 마디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줄 소감을 쓰니까 햐, 이 소감이야말로 진짜 시같다.

 놀랍게도 이 시집의 발문은 시인이면서 음악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옛 멤버였던 성기완이 제목을 "조선어 연금술사 통관보고서"라고 했다. 일단 발문의 제목을 '조선어'라고 한 것에 대해 왜 '한글'이란 말 대신에 '조선어'라고 표현했을까 의아했다. 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적으로 보수편향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성기완의 발문이 황유원의 시집을 빛나게 해준다는 명목하게 본인의 잘난 척만 오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완의 발문에서 읽었던가 헷갈리는 글을 여기서 쓰고자 한다. (잘난 척하는 그의 발문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 없어서)

 황유원의 시는 징징거리지 않는다.

 나도 시인 지망생은 몇개 봤다. 근데 걔들이 아직도 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뭐 등단하지 않았다고 시인이 아니라는 얘긴 아니지만 하여간 시를 써서 돈을 벌지 못하면 어쨌든 시인은 아니니까, 찐따들이 세상의 고통과 힘겨움은 다 지들 것인줄만 알아서 그런 거다. 2정도 아프면 대성통곡을 해대면서 9나 10 정도의 고통을 호소하고, 3정도의 외로움은 지구라는 행성에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고독이라 단정하는 시인과 시가, 솔직히 말해서, 넘쳐나지 않는가. 황유원이 슬픔을 한 번 인용해볼까?

 어느 바람 부는 날, "한치 학꽁치 미주구리 문어대가리"로 물회를 말아 물회를 담은 대접 속의 "얼음이 녹기 전에",


 바람 속으로 날아드는 새들이 생선을 다 채가기 전에 쌈장을 찍고 마늘을 올려서

 김에도 싸서 너의 입에 한 번,

 나의 입에 한 번

 바람 속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친화력과 공평함

 오늘 왜 난 자꾸 눈물이 날까

 이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길 좀 봐

 어느새 일렬로 늘어선 소주병들이 진한 방풍림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봐 앞에 앉아서 자꾸 핸드폰이나 쳐다볼 바엔 차라리 지나가는 여자 다리를 쳐다보지 그래

 <바람 부는 날> 부분


 너도 한 입 먹고 나도 한 입 먹는 친화력과 공평함을 알아차릴 때 시인은 눈물을 흘렸다. 시인의 눈물은 그러나 조금도 징징거리지 않고 계속 음주로 이어지고 음주 후 또는 어울리고 있는 지금, 다른 곳에 있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나 회상을 상징하는 그까짓 핸드폰은 내던지고 차라리 바로 지금 취한 눈 앞의 (아가씨도 아니고 그냥) 여자의 종아리나 한 번 바라보는 거다.


 그의 시적 관심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음악이다. 바흐부터 피아졸라, 재즈에서 일렉트릭까지. 한 20년 전 쯤, 지금은 종합편성 방송에 포니 테일로 머리를 묶고 나와 온갖 이슈를 망라해서 무차별적 구라를 때리는 김갑수가, 그래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브람스의 4번 교향곡, 특별히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LP에 침이 마르게 찬송한 이후, 원래 시를 잘 안 읽기는 했지만 시인이 음악에 관해 황유원 만큼 관심을 쏟는 것을 읽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중에 내가 좋다, 했던 시 하나 올린다. 황유원의 시는 전부 무지 길기 때문에 전문을 올리는 건 사실 좀 무린데.... 그렇다. 역시 전문을 올리는 일는 포기하는 게 좋겠다.


 사람과 하나도 안 똑같은 눈사람이

 눈과 끝없이 하나 되어 가는 밤

 숨죽인 채 발견되는 메모 같은 것

 그 메모의 여백 같은 눈송이들이 한 줄 두 줄 울다

 한 장 두 장 울기도

 아예 (상), (하)권으로 울려 버리기도 하는 밤

 고립되지 않았으면 낼 수 없었을 소리

 오로지 마음만을 반영하는 악기의 한 소절이

 두꺼운 고서(古書) 한 권의 냄새로 깊어져 방 안 가득

 퍼졌다가

 조금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무슨 빛이나

 소금처럼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밤

 <인벤션> 부분


 바흐의 <인벤션>을 시인은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하고 있다. 혹은 누가 인벤션을 연주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게 하필이면 어둔 공간에 눈이 가득한 겨울밤이었던 모양. 악보의 여백같은 흰 눈송이들이 울고, 악보의 한 장 두 장이 모두 다 눈물이어서, 인벤션 상, 하권이 시인을 울려버리는 밤.

 이미지가 꽉 들어온다. 인벤션을 들으며 슬픔과 눈물을 떠올리는 것. 저 위에서 얘기한 김갑수의 책에서 첼리스트 전봉초 선생이 한 말을 읽었다. 바흐를 들을 때 섹스를 느낀다고. 황유원은 바흐를 들으며 눈물을 체험한다. 섹스나 눈물, 이것들의 공통점은 애무와 눈물을 통해 바흐는 350년 차이가 나는 후세들과 교통, 교감을 하고 있다는 진실. 황유원은 이 시 <인벤션>에 와서 비로소 조금이나마 징징거린다.

 인벤션의 선율이 창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밤'이야말로 한 번 쯤 '한 번쯤 혼자 조용히 / 죽어보고 싶은 밤'이라고. 근데 가끔이라면 시인의 말대로 한 번쯤 혼자 징징거리는 모습이 또한 보기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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