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맛나게 먹고 심심해서 한 번 골라봤습니다.

역시 책의 순서는 의미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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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순원 단편집 <학 / 잃어버린 사람들>

 

 황순원 선생한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선생의 작품 가운데 백미는 역시 단편이다. 어느 하나 뺄 수 있겠는가만 <학>을 제일 좋아한다. 국어 교사를 하다가 조선어 말살 정책이 시행되자 평양 인근 고향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오직 조선어로만 작품을 썼던 진짜 선비.

 

 

 

 

 

 

 

 

 

 

 

2. 최인훈, <태풍> 

 

 

 우리나라 최초의 가상 역사 소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이 작품이 없었으면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온갖 형식의 소설을 다 실험해본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우화.

 

 

 

 

 

 

 

 

 

 

 

 3. 장용학, <원형의 전설>

 

 

 

 <원형의 전설>은 두 출판사에서 나오는데, 두산동아에서 찍은 건 원래 작품 속에 있는 모든 한자어를 다 한글로 바꾼 것. 그것도 좋지만 장용학은 뜻의 명확한 이해를 위해 조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글자를 한문으로 썼다. 지만지 책이 원본에 의거하여 만든 책. 나 같으면 이걸 고르는데 다른 분을 위해선 암만해도 두산동아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 책엔 <원형의 전설> 말고도 정말로 기념비적인 장용학의 단편들, <요한시집> <현대의 야> 같은 것들도 다 실려있어서. 한국전쟁은 작가들에게 실존에 관한 묵직한 숙제를 내주기도 했고 장용학은 처음부터 실존 문제에 집착, 아예 끝장을 봤다가 정말로 끝장이 난 문제적 작가. 난 이이를 굉장히 좋아한다.

 

 

 

 

 

4. 하근찬, <수난이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절묘하게 묘사해놓은 단편. 하근찬 선생에겐 좀 미안하지만 <수난이대>말고는 히트작이 별로 없는 것이 좀 아쉽다.

 

 

 

 

 

 

 

 

 

 

 5.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기행>도 무진기행이지만 이 책에 같이 실려있는 작품들,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눈부신 소품들이 즐비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여신의 멘스. <생명연습>에서 여고생이던가, 하여간 청춘학생이 하는 얘기. 우리나라 문학계에 제대로 뒤통수 한 방 때리며 혜성같이 등장했던 사내의 내밀한 감각. 덩치는 이따맣게 큰 인간이 말야.

 

 

 

 

 

 

 

6. 이청준, <소문의 벽>

 

 

 

이청준의 '전짓불의 공포'에 대한 각인이 찍혀있는 나는 전짓불을 빼고 그를 생각할 수 없다. 유년의 기억 속 한밤에 난데 없이 나를 향해 내쏘는 전짓불. 불을 비추는 저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생사를 가르는 대답을 해야하는 갈림길.


 

 

 

 

 

 

 

 

 7.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난 아이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이 책을 사줬다. 책을 완전히 다 읽어내면 적어도 지적인 시각으로 다 자란 것에 가깝다고. 인간의 기본적인 공포, 죽음에 관한 박상륭의 깊숙하고 유명짜한 고찰. 내 책은 한 권이었었는데 언제 두 권으로 분책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신자유주의란.

 

 

 

 

 

 

 

 8. 이문구, <관촌수필>

 

 

 

 말이 필요없는 명 문장들의 향연. <우리동네> <장한몽> 기타 등등에서 보인 이문구 식 걸쭉하고 유장한 입심과는 또 다르게 명징한 서정으로 유년과 조부에 헌정한 책.

 

 

 

 

 

 

 

 

 

 

 9. 황석영, <장길산>

 

 

 

 젊은 황석영표 대하소설. 홍명희의 <임꺽정>도 좋으나 역시 좀 오래 전 것이라 황석영의 이 책을 꼽을 수밖에 없다. 힘찬 영웅들의 모험담. 또다른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질박한 조선 민중들의 건강한 알통과 애뜻한 사랑 이야기.

 

 

 

 

 

 

10. 최명희, <혼불>

 

 

 

 길고도 재미있고도 무엇보다 아름다운 장편소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얼마나 섬세하게 썼는지 책을 읽으며 작가 최명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던 경이. 이렇게 긴 이야기를 썼음에도 진도가 반 정도 밖에 나가지 않은 듯한 아쉬움. 최명희의 단명을 탄함.

 

 

 

 

 11. 신경림, <농무>

 

 

 

 내가 번 내돈으로 처음 사본 책. 세상의 모든 쇠붙이, 총칼을 녹여 호미며 쟁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깨를 걸고 노래하는 한 바탕.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만 18세 청년은 새롭게 눈을 떳었다.

 

 

 

 

 

 

 

 

 

 

 

12. 서정춘, <죽편>

 

 

 

 겉멋이 아닌 진짜 시의 맛을 알게 해준 시집. 데뷔 29년이던가 만에 펴낸 처녀시집. 편편이 알뜰하게 써내려간 시들이라니. 하나의 노래라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내 책은 동학사에서 나온 것인데 그 회산 그새 망했나보다.

 

 

 

 

 

 

 


* 근데 이거 쓰기 정말 힘들다. 점심시간 지난지 벌써 40분 됐다. 괜히 시작해 눈치 보인다. 타의에 의해 그만 쓰겠다. 잘못하면 잘리겠다. 정말 이 포스트는 쓰다 만 거다. 이래놓고 보니까 시간 없어 이름을 올리지 못한 작가/시인들한테 미안하다. 오정희, 이문열, 김수영, 김주영, 조세희 등등(여기서조차 이름을 빼먹은 작가들한텐 진짜진짜 면목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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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6-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 서정춘, <죽편>은 처음 들어봅니다. ^^ <원형의 전설>하고 챙겨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06-09 11:34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읽고 뭐 할 얘기가 없더라고요. 극도로 절약한 단어들로 만든 짧은 문장과 짧은 시. 그러면서 할 얘긴 다 하는 거요.
일갈하더군요. ˝설사하듯˝ 시쓰는 시인에 관해서. 죽여주는 시가 많이 들어있는 아주 얇은 시집입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竹篇·1 ― 여행> 전문

대나무 마디마디가 기차가 되어 고향마을에 가는데, 결코 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백년이 걸린다니 살아생전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봄 밤에 술 한 잔 마시고 고향 생각하는 시인이 눈 앞에서 삼삼하지 않으셔요? ㅎㅎㅎ

그의 다른 시집 <봄, 파르티잔>도 역시 절창입니다.

Falstaff 2017-06-09 11:37   좋아요 0 | URL
<원형의 전설>.... 제가 잠자냥 님의 세대를 몰라 드리는 말씀인데요, 학교 다닐 때 한문 배우지 않았으면 두산동아 판으로 읽으셔요. 알라딘엔 품절이고 다른 인터넷 서점엔 재고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한문 배우셨으면 당연히 지만지 책이고요.

잠자냥 2017-06-0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한글전용세대라 지만지판 잠깐 보니 안되겠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