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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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바로 앞 작품 <고요한 집>에는 아흔 살이 넘은 노파 파트마가 이스탄불 근교 소도시의 낡은 저택에서 난장이 하인 레젭과 살고 있다. 노파의 온갖 치닥거리를 다 챙겨주는 레젭은 알고보니 노파의 죽은 남편 셀라하틴이 노파가 불쌍해서 집에 들인 하녀를 건드려 낳은 사생아다. 한 시절 터키의 잘 나가던 부르주아 출신인 파트마는 자신이 시집올 때 가져온 보석만을 팔아, 한땐 정권의 실력자이었으나 이젠 권력에서 쫓겨난 의사 남편이 죽을 때까지 그의 터무니 없는 백과사전 출판의지와 (첩과 사생아들의 식비를 포함한)바람기와 술값을 댔으며, 마지막 보석은 아들 대학보내고 하면서 이젠 사실상 거렁뱅이 신세로 전락했다. 이 아들과 몸 약한 며느리는 2남 1녀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출발하여 1년에 한 번씩 손자 손녀들이 성묘하러 산소에 들르느라 낡아빠진 저택을 방문한다. 저택의 땅을 팔고 그 자리에다 아파트를 지으면 돈 좀 만질 수 있겠다는 꿍꿍이를 가지고. 막내 손주는 앞날이 창창한 수재로 대학은 미국에서 마치고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터키로 돌아와 어여쁜 부르주아 아가씨한테 장가들 생각에 꽉 차있고, 한 살 위 손녀는 만민평등의 급진노선을 택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나이 터울이 심한 큰 손주 파룩은 역사를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1년에 한 번 고향집을 들를 때마다 시의 고문서 보관소에 거의 상주하며 터키 역사의 숨겨진 면모를 발견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이렇게 터키 근현대사 3대를 다룬 아주 재미난 책 <고요한 집>을 짧게 소개하면서 일독을 권하는데, 재미난 건, <고요한 집>의 한 주인공이자 집안의 장손 파룩이 <하얀 성>을 쓴 작가라고 전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하여 <하얀 성>은 오르한 파묵의 바로 전 작품 <고요한 집>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자 파룩의 동생으로 나오는 '닐귄 다르븐오울르'에게 헌정되었다('다르븐오룰르'는 서양의 과학을 대단히 선망했던 할아버지 셀라하틴이 법으로 성姓을 만들어야 했을 때 진화론자 '다윈의 자손'이란 뜻으로 지었다). 하여간 역사학자 파룩이 1980년 7월 경 소도시의 문서보관소에서 곰팡이 피고 군데군데 삭아 떨어진 책 한 권을 흥미롭게 읽고선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레둘레 쳐다보더니 읽던 책을 그냥 자기 가방 속으로 쑥 집어넣어 버린다. 이어서 여동생의 장례가 끝나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언어표기를 알파벳으로, 고어체를 현대문으로 바꾸어 책을 출간하니 바로 <하얀 성>이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 씩은 해보는 심사숙고. 왜 나는 나일까. 내가 옆집 상숙이가 아니고 우리집 영숙이인 이유는 뭘까. 미국에, 아니면 히말라야 산 기슭에 또 다른 내가 하나 더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소년기의 심사숙고는 거의 모든 인류의 공통된 고민이었고,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철학과 학문의 가장 깊숙한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하얀 성>은 이런 고민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다분히 라 만차의 기발한 기사 돈 키호테를 탄생시킨 세르반테스를 한 모델로, 즉 여러 모델을 혼합해서 만든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분명히 세르반테스인 것 같다는 것으로, 기독교를 믿는 이탈리아 인이 터키에 노예로 잡혀와 극도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는 줄거리다.

 터키에선 머리 좋기로 손 꼽히는 수재 호자의 노예로 떨어진 '나'. 내가 이래뵈도 선진 서양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으로 비록 노예이긴 하지만 애초부터 의사, 과학자, 기술자, 폭약 전문가로 나중엔 흑사병 예방 전문가까지 터키, 아니면 적어도 한 지역 파샤의 힘을 과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노예면 그냥 노예일 뿐. 내 유일한 꿈은 하루빨리 몸값을 지불하거나 탈출을 해서라도 꿈에서도 그리운 약혼자, 벌써 돌아가셨을 거 같은 부모님이 계신 이탈리아 땅을 밟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건 바로 시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나'란 인간의 실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모호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간다. 그리하여 언젠가 드디어 누군가가 터키 땅을 탈출해서 이탈리아로 향하는데, 그게 누구게?

 여기까지가 내 양심 상 제공할 수 있는 스포일러의 한계다.

 해설과 작가 연표까지 몽땅 합해서 240쪽 밖에 되지 않는 가벼운 책이지만 한 장 한 장이 흥미로운 이야기로 꽉 차 있어서 아침에 책 잡으면 해 떨어지기 전까지 다 읽게 돼있다. 이거 정말이다. 믿지 못하시겠는 분, 일독 해보시라.

 <고요한 집>을 먼저 읽으시고 다음에 <하얀 성>을 보시면 좋을 듯. 여기서 '하얀 성'이란 터키의 왕이 끝내 함락하지 못한 유럽의 한 성城을 말한다. 이런 건 뭐 일러드려도 무방할 듯.



 * 그끄제는 <고요한 집>을 개판이라고 흉보더니 오늘은 또 읽어보라 권해? 답의 1번은 내 맘이고, 2번은 사실 <고요한 집>도 읽으면서 짜증이 마구 날 수준의 교정, 교열까지는 아니고 3번은 그만큼 원 텍스트가 좋아서이다. 한 번 믿어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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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6-02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르한 파묵 작품은 왠지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ㅋ 이 책만큼은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고요한 집>과 관련 있는 줄은 몰랐네요. 암튼 이 작품 다 읽고 나서 바로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아니 대체 어디서부터 그렇게(!!!) 된 거야 허겁지겁 찾았다는 ㅋㅋㅋㅋ

Falstaff 2017-06-02 12:42   좋아요 1 | URL
전 파묵의 작품으로 이 책이 네번째인데, 재미는 별도로 하고 다 좋은 작품이었다는 데 동의하거든요. 그래서 며칠 후에 또 하나의 파묵 독후감을 쓸 거랍니다.
근데, 다 읽고 아 씨 좀 더 집중해 읽을 걸, ˝도대체 어디부터야˝를 진심 동의하면서 저도 후다닥 페이지를 거꾸로 넘겼었습니다. ㅋㅋㅋㅋ 아마 이 책 읽은 사람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했을 걸로 ^^; 짐작하고 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