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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보후밀 흐라발, 정말 내 취향이다. 이 책이 지난 해 말 서울의 종잇값을 올린다고 소문이 짱짱해 1월에 사서 이제야 읽었다. 1월달에 책에 관해 별 정보 없이 샀다. 그러길 다행이지 만일 자세하게 살펴봤더라면 본문만 130쪽도 되지 않는 중단편 소설을 선뜻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월에 이 책을 받은 첫 느낌이, 출판사 문학돈내의 얄팍한 상술 말고는 별로 없었다.
정말 내 취향이다.
한 늙은이가 있다. 1인칭 시점의 주인공 한탸. 이이는 35년간 폐지 압착을 해오고 있다. 젊어서부터, 그니깐 한 1910년대 중반부터 폐지를 압착한 한탸에게도 세계사의 격랑은 피해가지 않아서 근대사의 화약고였던 발칸반도의 서북쪽에선 왕조의 멸망, 오스트리아에 의한 지배, 1차 세계대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인접국가와의 갈등, 독일의 심각한 영향력 전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공산주의 체제 수립 등을 지하실의 압착기계와 더불어 겪어 나갔다. 35년 전부터 폐기되는 종이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던 한탸는 오래 전부터, 왕조와 귀족사회가 무너지며 그들의 개인 서재에 있던 고급 장정의 책들을 자연스럽게 읽게 되면서 스스로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알게 된다. 과거 어느 작가, 철학자가 써놓은 아름다운 글들과 사상에 관하여.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쪽)
조상, 아니면 적어도 선배인류로부터 받은 지식과 지성의 선물을 압착, 즉 폐기하기가 너무나 아까워 그는 한 권씩, 인류사상의 보물들을 집에 가져가기 시작한다. 수천권의 책이 한탸의 침실에 쌓이고, 이제 침대 위 선반을 고정시켜 놓은 녹슨 못 하나만 툭 부러지더라도 한탸는 몇백 kg이나 되는 책더미에 깔려 몇년 남지 않은 목숨이나마 재촉할 수밖에 없는 처지. 35년이란 세월. 내가 올해 직장생활 만 31년 차. 지긋지긋하면서도 이미 내 일부가 된 느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한탸의 소망. 압착기 역시 기계의 수명이 다 했으니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은퇴와 더불어 자신이 한 세월 함께 했던 고물기계를 사서 기계와 함께 사는 것.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은 매우 짧다. 더 이상의 스토리는 당신에게 분명한 스포일러. 근면하고 성실하고 대단한 지성까지 갖추게 된 늙은 한탸. 그의 소망대로 만족할 만한 죽음과 만날 수 있을까. 흐라발의 놀라운 비유. 인류의 지성은 격변하는 세계사에서 그나마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얼른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책 너무 얇다. 문고판 형식으로 만들어 책값을 확 내리든지, 작가의 다른 작품과 합해서 한 권을 만들라는 의미로 직접 사지 마시라는 뜻. 작품은 진짜 좋은데 출판사가 넘 후진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