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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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냥 님의 서재에 놀러 갔다가 필 받아 믿고 산 책. 나까지마 아쓰시, 라는 이름의 약골 일본인이 쓴 건데, 이 사람이 동경에서 태어났지만 열한 살 때 한문교사인 아빠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 6년간 용산 소학교, 경성중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낸 셈. 소년기는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아련한 쓰라림, 해진 상처, 누추한 그리움, 이런 류의 후회, 감상, 이런 것들을 다 합쳐 추억을 각인하게 되는데 나까지마도 마찬가지로 평생, 그래봤자 33년에 불과했지만 식민지 조선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가지고 있었나보다.

 이 책은 아홉편의 중국 고전 이야기를 각색한 단편과 세 편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고전 이야기 가운데 <산월기>가 그의 대표작으로 전후 일본 교과서에 주구장창 실린다는 작품이다. 단편이라 자세한 소개는 좀 힘들지만 수재 정도의 재주가 있으나 성질이 드러워 울뚝불뚝 열받기 잘하는 중국의 서생이 어느날 자기의 성질대로 범으로 변신해서 지나가는 과객들을 잡아먹는 신세가 됐다는 얘긴데 뭐에 관한 교훈이기에 교과서에 실리느냐 하는 건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기 바란다. 뭐 별로 특별한 것도 없다.

 오히려 내가 재미나게 읽은 건 두번째 단편 <이릉>이었다. 이릉이 누구냐하면, 장벽 저편에서 흉노족과 장렬하게 싸우다 포로가 되어 흉노에게 귀순한 장군. 위대한 시대를 만들었지만 엄혹하기 짝이 없기도 했던 한 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했다가 잘 드는 칼로 불알 두쪽을 싹둑 잘라버리는 궁형을 당했던 사마천. 기억나시지? 나까지마는 여기에다 중국의 전설적 충신으로 이름 높은 소무蘇武를 등장시켜 뜻을 굽히고 흉노에게 협력했던 이릉과 비교하는데, 이건 역사적 사실이다.

 

 선우는 투항한 한나라 장수 이릉을 소무에게 보내 회유토록 했다. "당신은 끝내 한나라로 돌아갈 수 없소. 이렇게 황량한 땅에서 고생을 자초한들 당신의 충성어린 일편단심을 그 누가 볼 수 있겠소. 인생이란 아침이슬과 같은 것이오. 어찌하여 이렇게 오래도록 산고생을 자초한다 말이요" 이릉은 여러 날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투항을 권유했으나 소무는 끝내 거절했다.
 "아! 참으로 의로운 대장부로다" 이릉은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했다. (출처: 경북일보 2016년 2월 21일)


 <산월기> 이야기는 중국의 어떤 옛이야기를 차용했는지 몰랐어도 이릉과 소무에 관한 일화는 알고 있었는바,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풀어서 소설적으로 만들어놨으니 당연히 더 재미있었기도 하겠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흔히 이야기되는 자로에 관한 소설 <제자>도 흥미로왔고, 뭐 다 재미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왕 있었던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만들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미 일본의 옛 이야기들은 이즈미 교카나 아쿠타가와 같은 이가 <고야산 스님>이나 <라쇼몽> 같이 다 써먹어서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다가 일본의 설화 대신 중국의 설화나 역사적 사실을 택한 건 아니었을까? 책 속에 나와있는 작가 소개를 보면, 1942년 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서른 세살에 죽었다고 하니, 그의 모든 작품은 1942년에 발표한 것이다. 1909년 생이니까. 일본 소설판의 경향을 몰라서 하는 얘긴데, 중국 설화, 역사 이야기는 젊은 나까지마가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에 썼던 거 아니었을까?

 이에 반해 식민지 조선을 무대로 한 세 작품엔 <산월기>보다 (적어도 내 눈엔) 더 세련된 분위기가 나는데 <순사가 있는 풍경- 1923년의 한 스케치>나 <풀장 옆에서> 같은 건 이 젊은 작가가 더 훌륭한 성과를 위하여 좀 오래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범 사냥>도 마음에 든 작품이었음은 물론이다.

 굳이 이거 한 번 읽어보시라 추천까지는 못해도 좋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단편집이란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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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14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 책이었군요. ㅎㅎ 저도 <제자> 읽고 자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겪은 일을 배경으로 쓴 단편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Falstaff 2017-04-14 11:13   좋아요 1 | URL
덕분에 작가 한 명을 알게 됐습니다.
옙. 전 조선 배경의 단편들이 더 좋더라고요. 좀 더 숙성된 거 같은 느낌이랄까, 뭐 숙성이라야 어차피 젊어서 간 사람이니까 어째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