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십자가 1 세계문학의 숲 33
안나 제거스 지음, 김숙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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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안나 제거스가 썼다는 거 딱 하나만 가지고 고른 책. <통과비자>에서 날마다, 당장 파시스트 나치에 의해 점령당할 거 같은 마르세이유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날이 아닐까, 하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유대인,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유색인종 등 압박 받을 사람들이 입국비자, 출국비자, 통과비자, 배표, 신분증, (수용소) 출소 증명서 등등 모든 서류의 구속 상태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잘 그려내 나로 하여금 별 망설임 없이 두 권으로 된 <제 7의 십자가>를 구입해 읽게 만들었다.

 이 책, 재미있다. 일곱번 째 십자가란, 수용소 3동 막사 앞에 플라타너스가 죽 서있었다. 근데 전직이 하수도 뚫어주는 직업의 마스터였던 수용소장 파렌베르크가 명령을 내려 줄지어 선 나무를 바라볼 때 가운데 일곱 그루의 수관을 벗겨내고 어깨 높이에 가로로 판자를 대 놓았던 거다. 수관을 벗긴다는 건, 쉬운 얘기로 껍질을 긁어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나무를 말려 죽인다는 뜻이고, 나무의 외피를 반질반질하게 만들어놨다는 얘기도 된다. 거기다가 가로 판자를 대놨으니 얼핏 보면 십자가 비슷하게 됐다는 거.

 일찌감치 나치 당에 가입해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파렌베르크의 주특기가 수용소에 입소한 정치범, 공산주의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동시에 자기 힘이 다 빠질 때까지 1번 부터 999번 까지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무참하게 두드려 패는 거. 입소만 했다하면 첫날부터 죄수들에게 가차없이 고문을 자행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여죄, 공범, 잔당, 조직 등을 알아내는 일 등이었는데, 고문 만큼은 파렌베르크 스스로 하지 않고 대신 자기 절친 수하, 마음 내키는대로 신경질 부리고, 눈이 뒤집혀라 고함을 지르고, 막되먹은 쌍욕을 해대도 묵묵히 듣고 있을 수 있는 심복에게 맡기기는 했다. 이 정도면 가히 지옥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더구나 당시엔 전쟁 터지면 시내 한 가운데 민간인 밀집지역에다가 폭탄 떨어뜨려도 전쟁범죄로 생각하지 않을 시기였으니 수용소에서 한 백명 정도는 고문하다가, 아니 말은 바로 하자, 고문 받다가 죽어버려도 어느 누구 눈껍데기 하나 꿈벅거리지 않았다. 근데 사람이란 족속의 특징은 생각할 줄 안다는 거. 어느날 새벽, 죄수 가운데 깡다구 센 인간 일곱명이 모여 삽자루로 경비병의 뒤통수를 후려친 다음 유유히 (솔직히 말하자면 벌벌 떨리는 몸뚱이를 건사하지도 못하고 두 발이 지상 10 센티미터 위를 날듯) 도망쳐버렸다. 딴 건 다 관두고 이 사건을 수용소장 파렌베르크 입장에서 고찰하자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시절부터 쌓아온 투사로서의 명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수용소장으로 시작해 거대 나치 당에서 서너 계단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졸지에 사라져버렸으며, 더 나아가 명성이나 승차는커녕 하찮은 수용소장 자리마저 보전할 수 없을 확률이 거의 98 퍼센트라는 의미였다. 파렌베르크는 100 빼기 98 해서 2 퍼센트의 확률을 붙잡기 위해 탈주범 일곱 명을 일주일 안에 체포하겠다고 선언하고, 잡혀오는 족족 플라타너스를 잘라 만든 십자가에 묶어놓겠다는 의지를 수용소 잡범들에게 과시하는 한편 자신 스스로도 정말로 밤에 잠 한 잠 자지 않고 그들이 체포됐다는 전화를 받기 위해 긴긴 밤을 하얗고 하얗게 새우고 있던 거디었다.

 소설의 제목이 제 7의 십자가. 마지막 십자가란 뜻이다. 그럼 당연히 탈주범 일곱명 가운데 여섯명은 일주일 안에 체포됐거나 사살됐거나 하여간 죽음을 당했다는 의미.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잡혔냐고? 에이, 돈 주고 사서 읽어본 본전생각이 나서 일러드리지 못하겠다. 전부 다 드라마틱한 도주에 이은 극적인 죽음 혹은 체포……는 아니란 것만 알려드린다.

 나머지 한 명. 그 사람 이름이 게오르크.

 책은 게오르크 때문에 곤경을 당하는 그의 아내, 아내의 친정아빠, 친구(들), 직장동료(들), 옛 동지(들),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 지나가면서 우연히 옷깃이 스친 사람(들), 그러나 무엇보다, 누구보다 게오르크의 무지막지한 난관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될까. 화끈하게 가르쳐 드린다.

 책의 8쪽에 요즘 소설치고 굉장히 예외적으로 등장인물이 '주요 인물들'이란 제목으로 나온다. 주요 인물들 가운데 마지막 네번째 인물이 크레스 박사, 크레스 부인. 뭐라 써있냐 하면 "게오르크의 탈출을 돕는 화학자와 그의 아내". 이를 보고 아예 다 가르쳐주네, 라고 불평할 이유 없다. 마지막 두 명을 보면 이렇게 써있으니까.

 술집 여종업원 : 게오르크의 국외 탈출 전날 잠자리 제공

 네덜란드 선원 : 게오르크의 국외 탈출을 돕는 이

 난 깜짝 놀랐다. 술집 여종업원이 누구길래 게오르크가 국외 탈출을 하기 전에 산과 들로 나가 여종업원이 손수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아 몸보신을 시켰나 싶어서. 두 권을 다 읽어가기 바로 전에야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게 아니라 한 번 했다는 얘기구나, 난 형광등이구나 하고 반성했다. 등장인물만 보면 스토리는 끝난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안나 제거스의 헌사 "이 책을 작고한, 그리고 생존해 있는 독일의 반反 파시스트들에게 바친다"에 어울리게 독일에서 있었던 파시스트의 준동사와 반파시즘 운동에 관해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하는 역작이다. 이 책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대한 송가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 공고했던 인간에 대한 찬사이다. 청년기를 시작하는 모든 스무살에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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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1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통과비자> 말씀하신 것 보고 최근에 사두었는데, 그거 다 읽고 나면 이것도 읽어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04-13 12:41   좋아요 0 | URL
감사하긴요. 저도 잠자냥 님 쓰신 거 보고 따라 사서 읽은 책, 낼, 다음 주 월욜 이틀에 걸쳐 독후감 등장하는 걸요. ㅋㅋㅋ
재미는 <통과비자> 보다 이 책이 훨씬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