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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제인 오스틴을 처음 읽었을 때, 작품이 <오만과 편견>이었는데 빅토리아 시대 이전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거 하나 가지고 참 이 처녀 대단하네 싶었다. 그래 흥미를 가지고 있던 차에 하나를 더 읽고 독후감도 쓴 적이 있다. 한 번 책껍데기 그림 보시라.
<에마>하고,오늘 낼 하는 늙은이들만 살라고 모아놓은 노생거老生居 수도원하고(제목에 관한 농담인 거 다 아시지?)그림이 똑같다. 조지 던롭 레슬리가 그린 <장미들>.
하여간, 난 <에마>로 제인 오스틴하고는 끝났다.
전에 충북대 독어교수 문광훈이 네이버 열린연단이란 컬럼인지 뭔지에서 <노생거 수도원>에 관해 아예 용비어천가를 읊어서, 평소에 <노생거...>를 쓰레기라고 인식하고 있던 차에 별 같잖은 소릴 다 듣는다는 짧은 판단으로 댓글에다가 '열 일곱살 고2 짜리 아가씨가 현실과 허구 사이를 헤매고 다니고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부자 총각 만나 팔자 고치는 얘기일 뿐인데 과찬인 거 같다'고 했다가, 아이고 어머니, 제인 오스틴 좋아하는 아주머니들이 왜 그리 많은지 이건 완전히 만인의 적이 되는 기분이 들어 어마 뜨거라 싶은 마음에 잽싸게 댓글 지운 적이 있었다. 점심 잘 먹고 와서 생전 안 하던 짓을 했더니 거 세상 인심이, 그냥 낮잠이나 잠깐 잘 것을 말야. 그게 2016년 말. 참 언짢은 것이 엄마 아빠가 애면글면 돈 모아 기껏 독일 유학보내 독일문학전공 박사까지 따게 했더니 이게 독일책도 아닌 영국책에 대해, 물론 나보다야 훨 많이 알겠지만 이리 유난을 떠나. 그럼 영문학 전공한 숱한 인간들은 뭘 먹고 살라는 말이냐고 괘씸하기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조금 배운 인간이니까, <노생거...>와 제인 오스틴에 대한 내 감상이 불공정했을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읽어보되 그중에서도 좀 두꺼운 거,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젤 두꺼운 책 <에마>를 골라 읽되, 이것 역시 내 기준에 염병이면 다신 오스틴 안 읽는다, 라고 마음 먹었다가, 마음 먹은대로 됐다.
본문만 702쪽. 해설과 연표까지 합하면 718쪽. 12,600원. 쪽당 단가 18원에서 조금 못미치니 가성비가 나쁜 편은 아니다. 아니, 훌륭하다. 다만 오스틴을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 먼저 밝힐 것은, 지금 <에마>에 대한 독후감을 쓰고 있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노생거...>와 열린연단에서 내 댓글에 대한 것들은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 완전히? 에이, 나도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겠지만 하여간 최대한 책 <에마>에만 집중해서 쓴다는 걸 알아주십사.
타이틀 롤 에마는 참 좋은 나이 스물 한 살. 만 나이니까 우리로 따지면 대학 3학년. 딸 둘 있는 쁘띠 부르주아 집구석의 둘째 딸. 엄마는 일찌감치 세상 하직하고, 언니는 시집가서 아이 다섯을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는 건전한 가정주부. 변호사 형부 역시 세상을 좀 시니컬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아주 모범적인 중산층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 원체 늙어서 장가든 아버지는 에마한텐 할배나 증조부 터울이라 세상의 모든 관심은 건강과 보건 뿐이고 운동능력은 거의 상실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완전 토박이에 신사계급의 우드하우스 가문이어서 지역에선 명사에다가 누구나로부터 그에 걸맞는 존경을 받고 있다.
에마가 자신의 가정교사 테일러 양을 신사계급의 동네 홀아비, 20대 초중반의 잘생기고 돈 많은 외삼촌에게 후견을 받아 세상 어려운 줄 모르는 청년의 아버지에게 소개를 해서 결혼에 성공하는 걸로 소설은 시작하고, 그리하여 에마는, 얘야말로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 예의범절 심지어 예지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초 일류 수퍼우먼인줄 단단히 착각하고 산다. 그래서 벌어지는 사달.
에마 앞에 눈부신 미모를 갖춘 열일곱살 짜리 사생아 아가씨 해리엇이 등장한다. 영국의 고만고만한 여학교에 다니다가 교장의 눈에 들어 교장의 집에서 사숙하고 있는데, 에마가 보기엔 저만한 인물로 시집 한 번 잘 가면 그야말로 인생역전, 로또는 절로가라고 거기다가 공,후,백,자,남작 부인이란 칭호는 받지 못하겠는가 말이지. 근데 알고보니 지금 동네의 건실한 농사꾼 청년 로버트 마틴하고 눈이 맞은 상태다. 비록 청년이 진짜로 건실하여 나날이 부유해지고 그렇다고 건방져지기는커녕 점잖고 예의바르며 갈수록 똑바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야말로 시골 촌놈. 결정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것이 흠이다. 오른 손을 두번 돌려 여인네한테 멋있는 코티시도 할 줄 모르고, 만나뵙는 영광을 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경의에 찬 치사를 뽑을 줄도 모르는 촌무지랭이. 그럼에도 감히 어여쁘기가 한량없는 헤리엇 양을 넘봐? 이거 넘한 거 아냐? 지가 뭐라고 옆에서 열받은 에마. 헤리엇 곁에서 찬란한 미래상과, 진정한 신사의 멋진 매너와,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에 대한 온갖 암시를 주입함으로써, 촌놈 로버트의 정중하지만 세련되지 않은 청혼을 무참하게 박살내게 만든다.
뭐 이런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무려 700쪽이 넘는 작품의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고, 이 작품이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기도 전인 1810년대에 쓰인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제인 오스틴이 여자를 보는 눈이 당시 일반인이 여자를 보는 눈 이상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것이 느므느므 아쉽다. 오스틴에게 여인은 당시엔 사실 거의 완전히 사라진 기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숭배를 받아야 하는 인종이지만 기꺼이 남편으로 대변되는 남성에 복종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에마가 아무리 똑똑하고 거기다가 재치까지 있고 눈치빨라 정말 참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며 결혼 대상자이긴 하지만 신분차이의 극복에 대해서는 아무 철학도 없다. 여기서 주목. 당시 잉글랜드는 앞선 산업혁명으로 세상의 어느곳에서보다도 일찍 부르주아들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권력을 갖으면서 신분제 역시 대단한 혼란에 빠지는데도 에마는 신분제도야말로 넘기가 어려워야 하는 굳은 벽일수록 좋으며 오직 신분제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건 여자들의 뛰어난 외모로 특정하고 만다.
내 말 혹은 의견이 틀려? 전에 읽었던 <오만과 편견>과 <노생거 수도원> 다 그런 거 아냐? 거기선 주인공들이 바로 그거 하나 때문에, 아 잠깐. 많은 분들이 오직 외모, 라고 하는 내 의견에 거품을 무실 지도 모르지만 좀 양해해주시기를 바라며 계속 독후감을 이어가자면, 당시 수준으로 기본 이상의 교육을 받아 신사가족 가량의 예의범절엔 도가 텄다는 전제로, 얼굴 예쁘고 몸매 잘 빠진 거 가지고 상류계급 총각의 혼을 빼 신분상승을 이루었으나, 적어도 <에마>에선 그런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스틴이 그리는 여인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은 이 작품이 더해서, 타이틀 롤 에마는 사실 인생살이가 일천한 헛똑똑이로만 묘사된다. 아니라고? 그래, 그건 당신 생각이고 하여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 하나 확실하게 밝혀둘 것은, 오스틴의 소설은 재미있다. 적어도 읽는 재미는 보장한다는 거.
그리고, '토머스 매콜리'가 어떤 작자인 줄은 모르겠는데(지금 네이버 검색해보니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역사가이자 정치가라고 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산문계의 셰익스피어다"
매콜리, 이 새끼 이거 미친 거 아냐?
독후감 첨 쓸 땐 책 제목과 비슷하게 발음할 수 있는 애마, 영화 <애마부인> 에피소드도 쓰려 했다가 잊었다. 다 쓰니까 아참, 생각나는데 나중을 기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