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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평점 :
에밀 아자르, 하니깐 생각나는 것이 1978년 김만준이 노래한 가요 <모모>와 이 노래의 주인공 모모가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서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소년 모모가 아니라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온 모모라는 거. 연애하던 아가씨한테 '모모'란 별명을 지어주었더니 좋아하더란 기억. 평생 저지른 바보같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약대 다니던 그 아가씨 놓친 일인데 물론 백퍼 경제적 이유로 바보같은 일이었다는 것이지만 하여간 그 아가씬 털이 많아 무릎 아래(무릎 위에 관해선 노 코멘트) 다리털이 피부에 밀착한 나일론 스타킹 때문에 옆으로 마구 누워 있는 건 물론이고 일부는 스타킹을 뚫고 비죽 나오기도 해서 털이 많다는 의미로 '모모' 즉 우리 말로 '털털'이라고 별명을 지었다는 걸 무슨 심사인지 하루는 그녀에게 알려주었고 하마터면 그날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도 하필이면 약학과 재학중인 아가씨가 어느날 시침 뚝 떼고 극미량의 시안화칼륨을 내 소주잔 주둥이에 싸악, 발라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간혹가다가 으드득 몸을 떨기도 했다. 아, 물론 조금 과장해서 그랬다는 거다.
당시엔 에밀 아자르가 세계적으로 문제적인 작가 로맹 가리와 동일인인지 아무도 몰랐고, 나도 여태까지 몰랐다가 어제 <가면의 생>을 표지 앞날개에 나온 연표를 보고야, 아 그새끼가 이새끼였어?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알았다. 전혀 몰랐던 쇼킹한 이야기를, 사실이 밝혀진 후 36년 반이 지나 알아채면서도 이렇게 험하게 욕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숱한 독자들이 <가면의 생>을 느므느므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도무지 이 작품에 동의하지도 못하겠고 공감하지도 못하겠고 만일 문학적인 성과가 있다면 그 성과가 무언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서이다. 이게 소설이야? 암, 소설은 소설인데 진짜 잘 쓴...., 하이고 내가 뭐라고 위대하다고 알려진 한 작가가 쓴 소설을 잘 썼네 아니네 까탈을 잡고 지랄이냐고 물으신다면 차마 어떻게 여쭈어야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쓰는 독후감이니만큼 전적으로 내 의견을 말씀드리면, 한 우울증 환자의 사색과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데에 대한 변명,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적 애로사항 같은 걸 늘어놓은 넋두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써 갈겨놓은 거다.
그런 의미에서 썅, 아마추어가 겁없이 주둥이를 한 번 열어보자면 이 소설은 전립선 비대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에밀 아자르가 이미 죽어버린 로맹 가리의 시체 위로 힘없는 오줌줄기를 졸졸졸졸졸졸 흘려놓은 자국이다. 방광은 터질 거 같이 부풀었는데 그만큼 비대해진 전립선 때문에 그치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게 그냥 질질 새서 흘러나오기만 하는 에밀 아자르의 가느다란 오줌줄기(漏尿)가 이미 죽어버린 스스로의 몸뚱이 위로 떨어지는 낙루를 댓 발자국 가량 떨어져 지켜보는 일, 이게 이 책을 읽는 일.
적극적으로 비추! 이름 값에 속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