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 1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 지음, 김병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은, 알라딘 서재에서 다른 가게 얘기하는 게 좀 안됐지만, 인터넷 서점 가운데 Yes24 딱 한 군데만 2017년 2월 2일 현재 품절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출판사 열린책들이 가끔 하는 기특한 일, 숨어있는 훌륭한 작품을 소개하는 작업 가운데에서도 앞줄에 서야한다는 거. 눈치채셨으면 얼른얼른 주문하시는 편이 좋을 듯. 거기도 재고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니. 

 우리나라 독자들이 이 책의 제목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흠, 그거 아시나? 오늘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 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일부분을 다시 읽어봤으며 흡족하지 않아 그걸 각색하여 오페라로 만든 베르디의 <막베트> 4막 대본을 들춰가며 기어이 문제의 이탈리아어 아리아 가사를 노트에 적어온 거. 4막의 테너 아리아, 맥더프, 오페라에선 막두프가 이렇게 노래한다.

 "Ah, fra gli artigli di quel tigre to lasciani la madre e i figli?"

 이걸 구글 번역기(이탈리아어 → 영어)를 돌리면 다음과 같이 된다.

 "Ah, between the claws of the tiger that I leave the mother and the children?"

 또 위 영어를 순화된 한국말로 해볼까?

 "아, 이 곤란한 처지를 맞아 내가 처자식을 버렸단 말인가?"

 흠. 나답지 않다. 너무 순화한 훈민정음이다. 좀 솔직한 정서로 바꿔보자.

 "아, 처자식을 맥베스 개같은 새끼의 발 아래 버려둬야 한단 말이냐?"

 내가 우리 말로 번역하면 어떤 경우에도 본문에서 나온 tigre 혹은 tiger 즉 호랑이 또는 범이 나오지 않는다. 직역해서 "아, 처자식을 범의 발톱 아래 두고...." 라 할 경우에 구닥다리 한국인들이 범을 생각할 때 떠오를지도 모를 은근한 경외 같은 게 앞설 수 있고, 하여간 복잡하다. 또 어려서부터 무수히 들어온 동화 때문이라도 이 책의 제목 "La Ou Les Tigres Sont Chez Eux"를 그대로 번역하면 적어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제목의 구태의연함 때문에 책을 읽고싶은 마음이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됐든 간에 책의 제목을 역시 순화한 훈민정음으로 바꾸면 '폭력과 야만이 판치는 나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여러말 할 거 없다, 어쨌든 우리말로 직역한 제목은 후지다.


 근데 책은 절대로 그러하지 않으니, 작가 로블레스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십수년 간을 자료도 모으고 궁리도 하고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했다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이 모든 준비와 준비기간이 그의 융숭한 지식적 밑받침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호랑이....> 같은 대단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1,000 쪽이 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움베르토 에코, 그래봤자 아직 그의 책은 <장미의 이름> 한 밖엔 읽어본 게 없지만 하여간 에코가 떠올랐는데 그건 이 책을 끌고가는 주요 에피소드, 17세기를 살았던 과학자, 천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가톨릭 신부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던 아나타시우스 키르허의 일생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에서 바로 그 키르허를 연구하는 남자 엘레아자르 폰 보가우의 일가족, 즉 브라질 통신원 엘레아자르, 이혼소속 중에 있는 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일라이니, 민속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공부보단 프리섹스와 마약에 더 몰입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딸 모에마, 그리고 이 세 사람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참여하는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20세기적 혼돈이 책의 주 내용이다.

 재미있거나 흥미를 돋을 만큼 훌륭한 책일수록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야박한 나는, 이 책의 경우엔 아직도 책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더 스토리를 숨길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첫번째는 17세기의 현자 키르허 신부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 심지어 이집트 상형문자의 성공적 해석이 세월이 몇 백년이 지난 지금 시선으론 허황하기 짝이 없고, 게다가 그가 발견 또는 해석해낸 모든 진리가, 세상의 진리란 어느 하나 예외없이 기독교적 진리를 증명하고 있다는 아전인수로 귀결하는 거, 엉뚱하기 짝이 없는 당대의 진실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낄낄거릴 수 있는 독자의 권리를 누리는 일이다. 자신이 발견한 모든 헛된 진리를 죽을 때까지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으며, 죽음의 침상에서조차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나가는지 저울로 달아보라는 유언을 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과학자. 아, 그리고 책이 끝나는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기막힌 반전. 비록 시점을 현재로 돌려 키르허를 연구하는 엘레아자르 가족사가 하도 기가 막혀 그리 큰 충격은 주지 못하지만 17세기의 사건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실로 어이없어 할 실소와 어처구니 없는 반전도, 사람을, 돌아가시게 한다. 그러나, 흐흐흐, 이젠 그게 뭐냐고 묻지도 못하시겠지? 절대 알려드리지 않을 테니까.

 20세기 말의 라틴 아메리카는 여전히 야만과 폭력이 창궐한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들로 사방으로 진흙탕을 튀었고, 진흙탕 속에선 여전히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졌으며,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에게 그나마도 빼았기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에 사는 인간들의 앞날엔 여전히 자욱한 안개만 뒤덮고 있었고.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 이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비록 아직 번역해 나온 그의 책은 이것 말고는 없지만.... 눈에 띄었다만 봐라! 파리를 낚아채는 카멜레온처럼 낼름, 잽싸게 읽어치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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