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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ㅣ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문제적 작가 조르주 페렉의 짧은 장편소설 <사물들>. 나는 이 책을 인터넷 책방에서 발견한 순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이 기괴한 유태인의 책을 무조건 샀다. 3년전 <인생 사용법>을 매우 재미나게 읽고 반드시 페렉의 다른 소설도 찾아 읽겠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는데 그새 깜박 잊고 살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페렉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라 브루더>를 쓴 파트리크 모디아노를 같은 부류로 치는 모양이다. 난 도무지 모디아노한텐 정이 가지 않는다. 이 전형적인 60년대식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하고 견줄 수 있는 작가? 혹시 김승옥 아녀? 만일 1960년대의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비슷한 경제, 문화적 수준에 있었으면 김승옥은 적어도 페렉과 견줄 수 있는, 어쩌면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사물들>이 세상에 나온 것과 거의 비슷한 1965년 6월에 김승옥은 서울에서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하는데 사실 <사물들>하고 <서울...>이 비슷한 건 하나도 없지만 난 <사물들>을 읽으면서 줄곧 동 시절을 살아가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도시적 감수성이 별로 다르지 않구나, 문득문득 떠올리고는 했다.
책을 들추면 처음에 헌사 "드니 부파르에게"가 나오고 또 한 장을 넘기면 멕시코까지 날아가 활화산 지대 아래 터를 잡고 살면서 인생을 알콜중독으로 마감시킨 작가 맬컴 라우리의 글을 써놓았다.
"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셀 수 없고, 과학의 발명과 발견이 가져온 생산력으로 얻게 된 온갖 풍요로움은 비할 데 없다.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고자 인간이 만든 경이로운 창작품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수정처럼 맑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삶이라는 샘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노동에 시달리며 이를 좇는 사람들의 목마른 입술에는 여전히 아득히 멀다."
페렉의 기념비적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 대해 예의가 아닐지 몰라도, 책을 다 읽은 다음 다시 앞으로 돌아와 서문을 대신해 적어놓은 라우리의 윗글을 읽어보면 이 한 단락의 문단이 <사물들>을 극적으로 요약해놓은 것으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세상은 무지하게 풍요롭지만 인간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대 초반의 커플 제롬과 실비 역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여러 모색을 하고 모색한 바를 실행한다. 현대인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돈이다. 혹은 돈이라고 '수긍할 수 있는 착각'을 저지른다. 근데 그것을 위해 아득바득하는 건 좀 이상하게도 자신의 행복을 가장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일. 맞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여기서 제롬과 실비의 절망지대가 펼쳐진다. 그걸 뭐라고 부르냐 하면, 인생이라고 하는 거다. 현대인의.
근데, 나도 꼰대라서 이렇게 책을 따져보고 헤쳐보고 있지만 꼭 이렇게 읽어야하는 법은 없어서 그냥 젊은 커플들이 사는 걸 따라가면서 동의도 하고 부정도 하고 그냥 같이 묻어가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리라.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도 사실 그걸 찢어발겨 분석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큰 숙제를 하는 것처럼 읽는 거 보다 포장마차에 같이 앉아서 국수가락 입에 물고 쐬주잔 기울이며 두 남자가 하는 얘기를 그냥 들어보는 게 더 즐겁듯이. 안 그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