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아이들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걍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쥐스킨트라고 하면 일찌기 <좆머 <좀머씨 이야기>가 좋다고 한밤의 이명耳鳴까지 들리길래 사 읽어봤더니, 하이고 참 나, 그딴 걸 달러화貨 또는 마르크화 혹은 유로화로 인세까지 지불해가며 읽는 대한민국의 문화수준, 참으로 경악스러워서 다신 쥐스킨트 읽나봐라, 각오를 했건만 이왕 내가 뼈빠지게 번 돈으로 새끼들이 사온 거 그거 읽지 않는 것도 심각하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어쩔 수없이 그것도 휴일에 시간을 내 읽어봤다. 결론? 뭐겠어, 걍 버킹엄이지. 시간 베렸다. 참 우리말 재밌다. '버렸다'라고 쓰는 거 하고 '베렸다'하고 쓰는 고 아슴아슴한 차이란.
18세기 초중반 세계적으로 가장 냄새나는 시궁창 파리의 생선 좌판. 생선내장에서 발산하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썩은 비늘이 질척거리는 진흙탕 위에 부유하는데 대구 내장을 손질하던 20대 중반의 여인이 다섯번째 아이의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진통이 시작되자 그의 후각으론 아무런 악취도 틈입할 수 없었으니 그렇게 진통의 강도가 그의 모든 혼을 빼놓고 있었던 거다. 드디어 다섯째 아이, 아들을 출산한 그는 여태까지 네번의 출산과 마찬가지로 생선 피와 내장 찌꺼기가 묻어 있는 칼로 아이의 탯줄을 잘랐고, 언제나 죽어서 나오거나 반쯤 죽어나오던 아이와 같겠거니 싶어 아이를 생선내장 부산물 더미에 버렸고 그때까지 녹슬었지만 날이 시퍼런 칼을 손에 쥔채 까물어치고 말았다. 상인들이 서둘러 여인을 둘러싸고 비슷한 시간에 쓰레기 더미를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순간 생선 내장과 비늘과 대가리와 뼈들 사이에서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맞이한 막다른 생의 골목에서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며칠 후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됐다.
쥐스킨트. 웃겼다. 18세기, 1738년에 비천한 신분의 영아 살인자한테 참수형? 단번에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참수형은 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상당한 관용을 베푸는 일이며, 비싼 임금을 주어야 하는 집행인 및 참수대 설치와 시민관객들의 호응을 이끌 수 있어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선 장사꾼도 아니고 생선의 배를 따는 일을 하는 여인한텐 부르봉 왕가는 결코 참수형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쥐스킨트가 몰랐을까? 하여간 좋다. 중요한 건 아이를 낳자마자 어미가 죽었다는 거니까.
하도 악취가 심한 곳에서 태를 끊어 그랬던가? 이 아이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날 때부터 체취없는 인간이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절대음감 비슷하게 절대후각을 지니게 되었는데 성능 또한 대박이라 공기중에 분포해 브라운 운동을 하는 분자를 집어내 후각 정보로 만드는 능력이 개코보다 10만 배 가량 발달했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사항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잘 하면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근데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이하 "<향수>")는, 물론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고 내 의견이 절대로 보편성을 지닐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얘기해서, 이후 흥미진진한 엽기소설로 치닫고 만다. <향수>는 곧바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이런 저런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끈질긴 인내와 후각천재성으로 그의 주특기인 냄새를 통해 인류를 정복하는 과정을 꾸며내는데 전력을 다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내가 시비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 된 인류가 말씀이지, 여기서 '인류'라고 하는 건 이 책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를 일컫는 건데, 자신의 모든 행위와 행위 뒤에 따라올 후속의 것들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거나 회의를 하거나 하다못해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 물론 전제가 그렇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감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하다못해 '수컷의 꼴림'도 없고), 사색도 없고, 말 그대로 냄새 빼고는 아무것도 그의 관심이 아닌 거다. 그래서 하는 일이 기껏해야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십대 아가씨들 스물 다섯명의 목숨을 빼앗고 아가씨들의 사랑스런 체취를 훔쳐 세상 유일의, 최강의 사랑의 향수를 만들어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거? 하이고, 됐네, 됐어.
내 책장에 쥐스킨트는 더 이상 없을 거다. <향수>. 읽자마자 얼른 아이들 책장에 다시 꽂아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