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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의 긴 여행 ㅣ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유디트 헤르만 지음, 우영주 옮김 / 마르코폴로 / 2026년 3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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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 신간이 나온 걸 알아챈 순간 곧바로 책을 사거나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 헤르만의 작품 가운데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는 장편소설일 듯하다. 이이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이 감각적인 문장이 가득한데, 비록 한여름을 이야기하더라도 어딘가 섬뜩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서늘함이 도사리는 글들.
지금부터 거의 30년 전. 그러니까 30년은 채 되지 않은 때,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가 현재 마흔일곱 살이니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중소도시의 신축건물 원룸 꼭대기 층에 살며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말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나’는 담배공장 생산 라인에서 담배를 일정 길이로 절단하는 기계 앞에서 불순물을 거르는 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공정에 서서 일한다. 자동장치라 알아서 처리를 하지만 혹시 불순물이 끼어 있을 경우 ‘나’가 제거하는데, 독자는 칼날이 위에서 아래로 철커덕 내리치는 공정에서 맨 손으로 제거하는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
공장에서 유일하게 귀마개를 하고 일을 하는 직원. 함께 일하는 동료한테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는 ‘나’. ‘나’의 즐거움은 5층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며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전경을 내려다보는 일. 여름엔 주유소에 달려 있는 작은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도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이 작은 가게에서 일이 벌어진다.
어느 날 아이스크림을 사서 계산을 하려는 순간, 문을 열고 깔끔한 검은 양복을 입은 백발의 중년 신사가 등장한다. 167cm, 절대로 작지 않은 키의 ‘나’를 보더니 “적당히 작은 키군요. 딱 좋은 키네요.” 꿍꿍이가 없는 어투로 말한다. 적당히 작다는 건 자신의 트릭을 기준으로 충분히 작고 알맞다는 말이란다. 그의 직업은 마술사. 자기 상자에 젊은 여자를 넣고 상자의 중간을 톱으로 썰어버리는 통 마술. 너무 자주 공연하여 이제는 조금 뻔한 마술이지만 현장에서 보면 여전히 섬뜩하고 작은 비명을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마술사는 아내와 함께 크루즈 선 오로라호를 타고 3개월간 싱가포르를 왕복할 예정이다. 오로라호 전담 마술사이며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한다. 통 마술에서 자신을 보조했던 여성이 그만 두어 ‘나’를 채용하고 싶어한다. 그는 ‘나’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고, ‘나’는 그가 아내와 사는 외딴 방갈로에 방문한다.
침대 외에는 거의 가구도 없고, 치장도 없어서 빈 집 같은 방갈로. 언제나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는 떠돌이, 방랑자일 터이니 집을 꾸밀 필요가 없다. 집도 굳이 자기집일 이유가 없다. 마술사와 그의 아내는 보조 여성이 해야 하는 일을 설명하고 곧바로 통 마술을 연습해본다. ‘나’는 작은 통에 들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전에 누군가가 누워 있던 자리에 같은 자세를 하고 있다. 통 속이 답답하지만 생각보다 편하다. 그런데 이 순간, 마술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정말로 톱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두 토막 내려는 건 아닐까?
그건 아니었고, 연습이 끝나자 마술사는 일주일 후에 출발할 테니 월요일 낮 12시에 중앙역에서 만나기로 한다. 거기서 기차 타고 항구로 가서 같은 날 저녁에 떠나는 배 오로라호에 승선할 예정. ‘나’는 선실 하나, 즉 독방을 사용하게 되며, 선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다. ‘나’의 주변을 다 정리하고, 즉 육지에서 ‘나’의 흔적을 모두 없앤 후에 바다 위의 크루즈 선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몸이 잘려야 하는 여자가 된다.
‘나’는 담배공장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만 두었다. 생각보다 많은 짐을 정리하고 트렁크 하나에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추려서, 비가 철철 오는 여름 대낮에 ‘나’의 집을 나섰다. 결론적으로 ‘나’는 싱가포르에 가지 않았고, 대신 오티스를 만나 결혼했고, 딸 앤이 생겼다. 앤이 성장해 열네 살에 첫 문신을 하고, 열여덟이 되자 집을 나서 긴 여행을 시작했고, ‘나’는 오티스와 이혼해 버렸으나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문자도 주고받으며, 가끔 전화도 한다. 마술사는, 이렇게 초반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영원히.
그러나 적어도 두 장면은 남는다. 5층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던 주유소가 있는 도로 장면과 톱으로 썰기를 기다리는 통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 그러나 실제로는, 톱질 당하는 여자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30년쯤 지난 후에야 그 여자가 기억이 나서, 작품 또는 최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30년. 기억을 충분히 왜곡시킬 수 있는 시간.
‘나’는 거의 1년 동안 오빠가 살고 있는 동해안에서 살았다. 오빠 사샤는 젊은 시절에 활동적이었던 사람이지만 나이가 들어 이젠 허풍 심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걸로 호가 났다. 주로 동네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조용한 술집에서 출입금지 처분을 당했을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 비록 그 술집에서 일하는 스물한 살의 여성 종업원과 새로이 연애를 시작한 50대 후반의 남자이기는 하지만.
스물한 살의 니케가 등장하면서 다시 통 이야기가 나온다. 니케는 어렸을 때부터 상자에 갇혀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어머니가 니케를 상자에 가두어 놓고 한 시간씩, 때로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상황에 따라, 어디에 가야 하거나, 손님이 오거나,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자기 멋대로 가두어 두었다, 라고 주장한다. 그 안에서 니케는 울었을 수도 있고, 원하는 것을 위해 반항 비슷한 것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 가둠을 당하는 일은 제법 많은 나이까지 지속되었다. 아이였을 때부터 당한 일이라 10대가 되어도 쉽게 반항하거나 뛰쳐나올 수 없었을 지 모른다.
‘나’의 옆집에 사는 유일한 이웃, 미미. 미미는 젊은 시절에 잠깐 동안 오빠의 연인이기도 했다. 미미의 집에서 미미의 어머니 암케가 침대까지 가져다 준 아침을 먹은 날부터 시작한 돼지 농장일을 사샤는 견디지 못해 도망쳤던 일이 있다. 이후 미미는 조각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지냈다.
미미. 동쪽 해변가 간척지에서 가릴 것이 없는 여자. 추운 초여름에 나신으로 수영을 하고, 커튼을 달지 않은 집 안에서는 전혀 거칠 것 없이 생활하는 이. 미미가 먼저 ‘나’에게 접근해 친해지고, 오빠와의 짧은 연애 이야기도 들려주기도 했으며, 함께 잔뜩 술을 마시기도 한다. 둘이 자전거를 타고 907마리의 돼지를 키우는 동생 아릴드의 집으로 쳐들어가 밤새 술을 마시는 통에 ‘나’를 아릴드의 침대에 오르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릴드 역시 ‘나’의 침대로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새벽 네 시만 되면 자기 휴대폰에서 울리는 모닝콜에 득달같이 일어나 돼지를 치러 가는 남자.
‘나’는 넓은 오빠네 집에서 살아도 되지만 해안 간척지에 있는 단독주택을 얻는다. 2층은 혹시 앤이라도 오면 지내라고 침대 하나를 놓았을 뿐 비어 있고, ‘나’의 생활은 전적으로 1층에만 국한한다. 이 동해안 간척지에서 집을 얻은 것이 1월 초. 매섭게 추운 날이 지속되었고, 2월이 되자 그때까지 몰랐던 동풍이 몰아쳐, 잠을 자는 새 분명히 닫은 현관이 열려 찬 기운이 방에까지 들이닥쳤으며, ‘누가 열었을까? 저절로 열렸을까?’ 무섭게 서늘한 생각이 들어 호신용 스프레이, 재크나이프, 전남편 오티스가 준 호신용 공포탄 권총 한 자루를 침대 밑에 두기 시작했다. 공포탄이라 해도 그걸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하면 맞은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 그런 줄도 모르니까 아릴드는 편하게 침대에 오를 수 있었겠지. 궁금하지? 권총이 소설에 등장하면 언젠가는 발사할 수밖에 없다고? 안 알려드린다.
게다가 갑자기 천장 한 모퉁이부터 저쪽 모퉁이까지 작은 짐승이 화다닥 달려가는 소리. 뭔가가 천장에 있다. ‘뭔가’가 무슨 동물인 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데, ‘나’가 도움을 요청한 돼지농장 주인이자 이혼남, 이라기보다 아내가 도망친 남자의 의견에 의하면 담비란다. 아릴드는 담비 덫을 적당한 장소에 설치하고 성호르몬을 묻힌 돼지 비계를 달아 담비를 유혹하건만 색깔이 찬란한 고양이가 한 번, 검정색의 새 한 마리가 한 번 걸릴 뿐이다.
이렇게 거의 완전히 고립된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황량한 벌판과 물, 간척지, 바다가 널려있는 풍경. 쓸쓸하고 고립되었으며 무언가 불행한 일이 곧 생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의 연속. 이게 헤르만을 읽는 즐거움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이의 벌판은 단편 쪽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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