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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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에 접어든 이해미는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 케르테스의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한달 전까지 만해도 제법 알려진 신문사의 기자로 재직하던 해미는 저널리즘이 정체가 어떤 모습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염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단 다음 직업에 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신문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 버린 것. 우연히 이 때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이 열린다는 걸 알고 거의 한 달째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 도장 찍듯 전시관에 가서 폐관시간까지 똑 같은 사진을 관람하던 차였다.

  이곳에서 우연히 우재를 닮은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 해미한테 케르테스의 사진을 처음 소개해준 대학 동기생. 해미는 사회학과를 다니고, 우재는 약학과를 다녔을 때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이십대 초반. 서로 들뜨고 갈급했던 시기. 그러나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우재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입대했고, 연상의 연인에게 실연을 당했으며 제대해 복학할 당시 해미는 모든 학부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눈 앞에 둔 상태였다. 함께 캠퍼스에 있을 때에도 둘은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거나, 적어도 두 명 가운데 하나는 연애를 하고 있어서 그저 인연이 안 되는 괜찮은 애 정도로 여기고 말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게 벌써 근 20년 전이다.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았으면 사실 아는 척을 하더라도 짧은 인사 후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는 서먹함이 뒤따르는 법. 미해도 우재도 벌써 이 정도는 이해할 나이. 미해는 전시장에서 나온다. 근 한 달 동안 매일 들른 전시관 현관 앞에서 오늘따라 전시회 포스터를 오래 바라보고 있던 이미해. 작품에는 안 나오지만 왜 하필이면 우재를 만난 오늘 늦은 오후에 그동한 숱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포스터를 유심히 보고 서 있었을까? 벌써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고, 연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시절 조금 가까이 지낸 동아리 친구 우재와의 시간을 만들어볼 속셈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하여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재가 전시관에서 나오고, 미해를 발견하고, 혹시 이해미? 아는 척에 이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며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S의 결혼식이었나?”로 시작해서 “아, 너는 결혼했어? 소식을 들은 게 없어서 못 갔는데, 혹시 했다면 미안.” 이러저러한 얘기 끝에 둘 다 공히 마흔 살에 접어들도록 아직 미혼 상태인 것을 확인한다.

  마흔살이 되면 고향에 가서 약국을 열겠다는 어릴 때부터 우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곧 제주로 내려가 약국을 개업하겠다는 말은 이 모든 일상적 이야기의 뒤에야 할 수 있었겠지. 미해도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에 가 보았다. 기말시험이 끝난 학기 말에 동아리 선배들이 MT 겸해서, 매번 가던 대성리나 새터 같은 곳에 질렸다고 돌발적으로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으로 가보자고, 돌발적인 결정을 내렸고, 그 기회에 미해 역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 보았다. 그때 알았다. 제주의 이국적인 야자수 가로수들이 사실은 원산지가 제주가 아니고, 제주를 관광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저 민주공화당 시절의 정치인이 야자수 묘목을 도입해 제주에 심은 것이라는 것을.

  독자는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외국의 나무가 제주도에 입식되어 그곳에서 몇 십년 터를 잡고 제주의 한 모습으로 고착했으니 이제는 외래 야자수도 제주의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는 점을. 그저 마흔 살의 해미와 우재가 늦게나마 만나서 관계를 이루어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만 받을 정도로 프롤로그는 끝난다.

  그럼 여태까지, 독후감의 반 정도를 프롤로그 이야기하느라 소비한 건가? 그렇다.


  해미의 가족은 이제 부모와 해미, 해미의 동생 해나, 이렇게 네 명 남았다.

  해미가 열한 살이었을 적에 가족은 부천에서 서울로 이사했고, 아이들도 당연히 전학을 해야 했다. 이때는 해미한테도 언니 해리가 있었다. 해리는 해미한테 전학 왔다고 쫄지 말라고, 턱을 수평 이상으로 들고 다니라는 의미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해미가 애들 사이의 기준이 될 거라면서. 정작 언니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지만. 언니 해리는 공부도 잘하는 범생이.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는 엉뚱한 집념에 싸인 20세기형 모범생 언니한테 해미는 종종 “아파도 조퇴하겠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멍청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이때가 아마 1994년 12월 7일이었고, 가족이 이사와 살던 곳이 아현동 근처였던 모양이다. 학교 수업 도중 교사에게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말한 모범생 해리한테 담임은 얼마나 아프면 모범생 해리가 조퇴를 신청할까, 안쓰럽게 생각해 곧장 이를 허락했고, 학교를 나온 해리가 오후 두시 50분경 도시가스 저장고 부근을 지나던 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저장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부근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50명 가운데 한 명이 돼 버리고 말았다.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고, 집안에서도 좋은 맏이였던 딸이 갑작스럽게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후부터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균열이 발생했다. 이건 어떤 면에서 정상적인 결과인데,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고, 사고와 상실을 당한 가족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책임 전가가 부부 사이의 끊이지 않는 격렬한 싸움으로 변질된다는 뜻이다. 숱하게 많은 부부가 이 비슷한 일 때문에 갈라서고, 그보다 더 많은 가정이 오랜 시간의 고통 속에서 어찌어찌 지내다가 세월과 함께 기억이 흐려질 때까지 질긴 삶을 이어간다.

  해미네 가족도 그랬다. 엄마와 아빠는 극렬하게 부부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둘 사이의 크레바스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부부는 헤어지기 직전에 이혼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청에 부임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고, 독어교육을 전공한 엄마는 신학 석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이제 둘 남은 딸들과 독일의 대학도시인 G시로 떠나 2년 동안 지내기로 했다. 물론 해미 친가에서는 말도 많았다. 죽은 맏딸의 보상금으로 엄마가 딸들 데리고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가족을 해체시키려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친척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아빠가 나쁜 남편은 아니라서 이런 말이 쑥 들어가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비록 대학도시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소도시 G시를 고른 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엄마의 큰언니 오행자 박사, 해미한테는 큰 이모가 G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형제는 나이 순서대로 이모, 쌍둥이 외삼촌 둘, 그리고 막내로 엄마가 있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아쉽지 않게 먹고 살던 외갓집의 맏딸, 엄마는 언니가 한 명이라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될 텐데 꼭 큰언니라고 불러 해미 역시 큰이모라 하는 것이 입에 붙은 이모. 전남 지역에서는 손꼽히게 공부를 잘해 수재라고 불렸던 이모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독자가 보기에 아마도) 작은 내과 의원의 개업의인 듯했다.

  그러나 시작은 미미했으니, 오행자 큰이모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갑자기 외할머니가 중병에 들어 전라남도 강진 부근의 넓고 넓은 들이, 외할머니의 병원비로 다 날아가버리기 시작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집에 오래 가는 병자가 한 명 생겼다 하면 집구석 거덜나는 건 오직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우리 집구석도 이런 집 가운데 하나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그렇게 망가진 집안은 아주 회복할 수 없거나, 비슷한 수준에 다시 오르기 위하여 적어도 두세 세대가 필요한 거 같다.

  한 순간에 거덜난 집구석에서 맏이로 큰이모가 선택한 것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서독 파견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되어 비행기를 타는 일. 큰이모는 독일에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직무 관련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 간호조무사에서 정식 간호사를 거쳐 계속 의학공부에 몰두, 드디어 내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마도 1995년, 미해가 열세살 겨울부터 열다섯 살 겨울이 될 때까지 미해는 독일 G시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이 시절 독일 G시에서의 일이며, 특히 독일 파견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출신 여사님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로 꾸몄다.


  해미와 동생 해나는 독일에서 자연스럽게 마리아 이모의 딸이자 반half독반한 혼혈 레아, 한 살 위 한국계 독일인 한수와 친구가 되고, 해미와 해나도 독일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지만, 스토리의 핵심은 뇌종양 전력이 있는 간호사 선자 이모의 첫 애인 KH를 찾는 일이다. 언제 뇌종양이 재발해 생을 마쳐야 할 지 모르는 말수 없는 억척어멈 선자이모의 아들 한수는, 엄마가 죽기 전에 이미 떠난 파독 광부 출신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KH라는 이니셜의 연인을 찾아, 가능하다면 독일로 초청해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주고 싶다. 착한 아들 답게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한수와 레아, 그리고 미해가 일종의 탐정 놀이 비슷하게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은 해미가 열세 살이었던 1994년부터 시작해 마흔 살인 2020년 경까지 계속된다. 20여 년 동안 찾았다니까 결국 문제의 KH, 이미 고인이 된 선자이모의 첫사랑이자 벌써 노인이 된 KH를 찾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 독자는 이제 해미가 거동마저 불편한 KH를 만나고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까지 모두 본 다음에, 프롤로그에 이어 다시 에필로그에서 각본대로 해미가 우제를 만나는 장면으로 책을 덮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추리소설 기법으로 작품을 진전시키는데, 아오, 백수린의 거미줄 또는 실핏줄 같은 문장이라니. 그렇게 섬세하고 깔끔하고 사색적인 문장이 아주 제대로 감성을 폭발시켜, 독자는 간질간질한 섬세함과 사색과 고독 속에 질려서 까무러쳐 버리기를 몇 차례인지도 모른다. 질리고 질려서 책의 중간도 오지 않아, 무지하게 지루한 난관까지 만나는데, 애초 이런 작품들로 독서생활을 시작한 독자들은 연신 감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나,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같은 또는 비슷한 귀절을 매끄럽지 않은 둔주법, 푸가로 연주해대고 있으니, 귀 밝지 않은 절대 음치더러 도무지 뭘 하라고 하는 말이고 문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시지? 하여간 아마추어가 읽기에 그랬다는 거니까, 백수린의 많은 팬들이 읽기에 기분 나쁜 독후감이라도, 세상에 같은 의견만 있어도 좋지 않은 법이라는 선에서 이해해주시기를 앙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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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0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실핏줄같은 문장이라니... 너무 적절해서 진짜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ㅎㅎ 전 거미줄보다는 실핏줄에 한표입니다. 거미줄은 좀 끈적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래서 백수린 작가는 실핏줄. ㅎㅎ 물론 이런 문장을 좋아하고 말고는 독자의 몫일뿐이고요. 저는 이런 문장을 안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백수린 작가는 또 좋아요. 실핏줄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호불호가 달라질듯요.

Falstaff 2026-09-09 08:55   좋아요 1 | URL
아침 햇살에 비치는 영롱한 거미줄, 그거 참 미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