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체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3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평점 :
.
8월 말일이니 오늘을 기점으로 어쨌거나 여름은 간다. 펄펄 끓는 8월에만 세 번째로 네미롭스키를 업로드한다. 맞다, 더워서 내가 조금 미쳤다.
세 번의 네미롭스키에서 두번째, <6월의 폭풍>은 재미없었다. 이야기가 분량에 비해 너무 방만하고, 등장인물도 수다한 바람에. 그런데 <돌체>를 읽고 전작이 재미없던 것이 다 이유가 있구나, 탁 알아챘다. 지난 주 독후감에 말했다시피, 네미롭스키는 2차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모두 5부작을 <프랑스 모음곡>이란 제목으로 구성해서 1권 <6월의 폭풍>, 2권 <돌체>를 썼고, 3부는 대강의 스토리만, 4부와 5부는 제목만 정했다고 했다. 이건 <6월의 폭풍>을 한 편의 완결된 장편소설로 읽으면 나처럼 별 재미없는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각 권을 각각의 한 작품으로 읽어도 되기는 하겠지만 1권부터 5권까지 마치 대하소설 비슷하게 읽는 게 훨씬 바람직할 터였다. 물론 작가가 작품을 쓰는 도중에 세상을 떠서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6월의 폭풍>은 그러니까 5부작의 1권답게 앞으로 펼쳐질 스토리의 단초들이 가능한 한 많이 나와야 하니 독자 기준으로 조금 난삽하게 느꼈겠다.
2권 <돌체> 역시 한 권의 독자적인 장편소설로 읽힌다. 그러다가 작중 조금씩 어딘지 친숙한 분위기가 느껴질 때쯤 아하, 전편의 특정인물이 이 장소, 이 등장인물하고 연결이 되는구나, 알아채게 된다. 이럴 때 독자는 당연하게 자잘한 즐거움을 배로 느끼는 게 보통이기도 하고.
<6월의 폭풍>은 1940년 6월 4일에 시작한다. 그로부터 한 열 달 후인 1941년 봄. 중부 프랑스의 작은 읍, 면 단위의 뷔시. 시내도 아니고 작은 농촌이 주 무대이다. 특히 부르주아 앙젤리에 가문. 이 앙젤리에 가문의 집도 독자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6월의 폭풍>에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다. 코르뱅 은행에 다니던 잔과 모리스 미쇼 부부가 뷔시 방면으로 피난을 가 며칠 묵은 집이 바로 앙젤리에 저택. 그리고 프랑스 말로 뭐라 하는 바람에 1권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앙젤리에 저택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소작인 집의 주인이 브누아 라바리. 미쇼 부부의 외동 아들이자 죽어가는 프랑스군 부상병 장마리 미쇼가 몇 달 동안 요양을 해 완쾌한 집이다. 거기서 도시의 예쁘장한 대학생이기도 했던 장마리와 사랑을 만들어간 마들렌은 지금 집주인 브누아 라바리와 결혼해 아이도 하나 있다. 1권에서 약혼자 브누아는 프랑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독일 땅에서 탈출해 뷔시의 집까지 걸어서 온 신체 건강한 공산주의자다. 그래서 귀족, 부르주아 알기를 개떡 같이 안다.
앙젤리에 가문에 지금은 두 부인만 산다. 포로로 붙잡혀 독일로 끌려간 가스통 앙젤리에의 어머니와 아내. 어머니는 앙젤리에 부인, 아내는 ‘뤼실’이라고 하자.
뤼실은 남편 가스통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다. 당시에는 대지주의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잘못된 투자를 하는 바람에 재산을 날려 결혼과 동시에 남편 가스통은 아내 뤼실을 돌 같이 알기 시작했다. 이런 단계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디종에 사업상 드나들다 모자 판매점에서 옛 대학 시절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만나 발작적으로 연애를 시작해서, 연애를 한 김에 혼외자도 하나 만들었다. 씨를 책임지기 위하여 가스통은 도시 변두리에 작은 집을 마련해 일년의 절반 정도는 사업 명목으로 디종에서 보내고 있다. 물론 뤼실도 이를 알지만 엄마 앙젤리에 부인은 전혀 모른다.
앙젤리에 부인은 전형적인 시어머니로 돈도 없이, 돈만 바라고 결혼한 것처럼 보이는 며느리 뤼실을 지극히 미워한다. 말도 거의 없다. 하는 꼴이 고운 것도 하나 없고 특히 뤼실이 책 읽는 꼴을 못 본다. 책을 폈다 하면 곧바로 타박이다.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책을 꼬나보고 그 모양이니? 상추쌈 먹는 모양도 꼭 시어미를 째려보는 것 같고.
드디어 1941년 봄. 독일군이 뷔시에 세 번째로 들어왔다. 독일군은 점령지 주민에게 두려움, 존중심, 혐오감을 갖게 했고, 프랑스 시민으로 하여금 그들도 필요한 것이 있을 게 틀림없으니 독일군의 돈을 갈취해 그들을 이용해서 바가지를 씌우고 싶어하는 짓궂은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책에 나오는 네미롭스키의 독일군은 우리가 그동안 영화를 통해 숱하게 본 악랄한 나치, 게슈타포가 아니다. 이 책의 역자 이상해가 번역한 베르코르의 작품 <바다의 침묵>에 등장하는 파리 주둔 독일군 장교처럼 매너 좋고, 기품 있으며 예술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할 줄도 아는 신사도가 몸에 밴 사람들. 중부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금발 머리에 창백한 피부와 깊숙한 눈동자를 지닌 꽤 큰 덩치의 젊은 사나이들.
기억하시라. 지금 프랑스의 절은 남자들은 거의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근 2백만 명이 포로로 잡혀 독일 땅에서 박박 기며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꽤 그럴듯한 저자가 쓴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인류학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전쟁은 필연적으로 인구, 특별히 남성 인구의 감소를 가져와 여성으로 하여금 (본능적으로)출산 욕구를 높인다고 한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소나무일수록 솔방울을 많이 매달듯이. 젊은이라고는 여성들만 바글거리는 뷔시의 시골 동네에 젊고 잘 생기고 깨끗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떼로 들어왔으니 여성들 마음이 어떻겠어?
이런 독일병사와 연애를 하는 양장점 여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죠?”라고 묻는 뤼시 앙젤리에에게 말한다.
“뭐가 어때서요?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친구든 적이든, 그 사람은 어쨌거나 남자예요. 전 여자고요. (중략) 여기 남자하곤 질이 달라요. 피부도 부드럽고, 치아도 하얗고, 키스할 때도 신선한 숨결이 느껴져요. 이곳 남자처럼 술 냄새가 나진 않죠. (중략) 전쟁과 그 모든 격변이 우리 삶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놨어요. 남녀 사이에는 그딴 거 다 소용없어요. 영국인이든 흑인이든 내 맘에만 든다면, 그에게 절 바칠 거예요. 가능하다면 말이예요. 제가 혐오스러우세요? 물론, 그렇겠죠. 당신은 부자에다 제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도 누리실 테니” (p.141)
이 인용문에 내 메모가 달렸다. “마음에 드네.”
근데 문제는, 독일군이 주둔을 하긴 했는데, 많은 병사들을 재울 장소가 없다. 사병들은 그냥 회관 하나 빌려서 자라고 하면 되겠지만, 부사관이나 장교, 그것도 위관, 영관, 장군 등의 계급을 나누어 그에 걸맞은 침실을 확보할 도리가 없다. 호텔 비슷한 것도 없는 동네. 그리하여 저 시골집, 불과 몇 달 전에는 프랑스 부상병 장마리 미쇼가 병을 다스리던 라바리의 집에는 열아홉 살 먹은 통역 장교 쿠르트 보네 중위가 묵고, 앙젤리에 저택에는 기병대 지휘장교인 부르노 폰 팔크가 들어가게 됐다. 앙젤리에는 지주이자 부르주아 저택, 라바리는 앙젤리에의 소작인 집. 그러니까 같은 중위라고 해도 쿠르트 보네가 아무래도 끗발로 쳐서 부르노 폰 팔크한테 한참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 그렇다. 지금 파리를 통치하는 군사령관의 친위참모가 폰 팔크를 가장 사랑하는 삼촌이고, 쿠르트 보네는 루이 14세 시대에 독일로 쫓겨간 프랑스 혈통이란다.
보네가 들어가 지내는 소작인 집의 주인 브누아는 조금 의처증 기질이 있다. 있을 수밖에 없게 생겼다. 포로로 잡혀간 딱 그 세월 동안 자기 집에 부상병 장마리가 와서 지금의 아내 마들렌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해 주었다는 걸 동네 사람들과 누이동생한테 들어 알고 있던 터. 이제 새롭게 새파란 독일 어린 놈이 집에 와서 젊은 아내가 아이한테 젖 먹이는 광경을 못 본 척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사고가 나겠어, 안 나겠어?
하지만 작품의 진짜 줄거리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라고는 1도 없으면서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남편이 저 멀리 독일도 아니고 프러시아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뤼시와, 그 집에서 달달한 사랑을 엮어갈 수도 있는 잘 생기고 훤칠하고, 피아노 연주가 수준급인 음악적 자질이 대단한 작곡가 선생 부르노 폰 팔크 중위 사이에 있다. 이거, 연애를 해야 해, 말아야 해? 요즘 소설이라면 연애는 모르겠고, 한 번 하기는 틀림없이 할 것 같은데, 1942년에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이렇게 재미난 건 내가 알려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네미롭스키는 여기까지 쓰고 아우슈비츠에서 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