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시간 창비시선 494
김해자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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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자는 신안 출신, 목포에서 초등과 중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재수? 하여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이던 1984년에 광주학살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당해 훗날 복학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인터뷰 기사 말미에 학력을 고려대 국문과 졸업이라고 해놓았으니까.

  이후 인천의 공단으로 가서 “잿빛 같은 15년”을 보냈단다. 국제작가축제의 참가자 소개를 보면 “2, 30대 시절 전자 공장과 봉제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하는 자신과 동료들의 삶을 받아 적다 시인이” 됐고, “4, 50대부터는 학생, 어른, 치매 병동, 알코올 병동, 홈리스, 기초수급자 가리지 않고 찾아가 강연과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천안시 인근)시골에서 농사지며 이웃의 삶의 이야기를 가끔 시로 쓰고, 관계가 끊어지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약자들이 죽음으로 몰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현대 문명의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스무 살에 받아들인 80년대 운동권의 감각을 65세인 지금까지 45년 이상 저 들의 푸르른 솔잎처럼 변하지 않고 지켜내고 있는 시인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 대학 재학/졸업자가 인천 공단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을 위조하여 들어가 노동조합에 개입한 듯한데 뭐 지난 이야기 길게 하면 좋을 거 없다. 하여간 상당한 정도로 왼쪽 멀리 가 있는 건 확실하다. 시를 읽어봐도 그렇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초판 발행이 2023년인데 상당한 시들이 예전 투쟁시기에 머물고 있다. 직접 그것을 바로 그 현장에서 경험한 시인으로 시절의 고통과 투쟁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질곡이겠지만 말이지. 예컨대 <이름 없는 조직>이란 시의 2연을 읽어보자.


  “순간, 가좌동 쪽에서 본드 냄새가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온종일 신발 바닥에 본드칠하다 우우 몰려가 발바닥 닳도록 춤추던 송림동 카바레, 어디선가 단무지 냄새가 풍겨오는 것도 같았어요 철야 끝난 일요일 잠시 눈 붙이고 달려간 신포시장, 볼이 미어져라 먹던 왕만두 냄새, 미싱에 앉으면 만주에서 말 타고 달리는 듯하던 열여덟살 현옥이와 장덕이가 대한서림에서 책장을 넘기고, 바로 옆인 듯 애관극장에서 파업전야 같은 필름이 돌아가는데 (p.26~27, <이름 없는 조직> 부분)


  지금도 가좌동에 신발 공장이 있나? 만일 여전히 있다면 신발 바닥에 본드칠을 사람이 할까, 기계가 할까? 사람이 한다고 치더라도 우리나라 노동자가 할까 외국인 노동자가 할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만 두자. 시인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딱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관두자. 이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옛 사람들.

  다만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오랜 이야기이다. 그때 타도해야 했던 건 많이 사라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지경으로. 그럼에도 시인은 여전히 80년대, 심지어 서울의 봄 광경도 시로 읊고, 1951년 전쟁당시 국방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노래한다. 누군가는 노래해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전쟁이나 학살, 집단 희생 같은 큰 규모의 심각한 비극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삶의 뒷방에서 그저 조용히 평화롭게 조근조근 책만 읽으며 살고 싶다. 이것도 잘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이의 시집 가운데 드물게 등장하는 서정시 한 수 올리고 독후감 접겠다.



  꽃잎 세탁소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퍼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욜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게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전문.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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