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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한 페이지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2
에밀 졸라 지음, 이미혜 옮김 / 빛소굴 / 202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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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여덟번째 작품. 아델라이드 푸크가 마카르와의 혼인 외 관계로 얻은 1남 1녀, 앙투안 마카르와 위르실 마카르 가운데 딸, 위르실이 모자 제조공 무레와 결혼해 고향 마르세유에서 낳은 외동딸 엘렌을 둔다. 이 엘렌 무레 그랑장이 루공-마카르 총서 8번 <사랑의 한 페이지>의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부유한 제당업자의 아들 샤를 그랑장은 불같이 엘렌을 사랑하여 결혼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아버지 그랑장씨는 엘렌의 집이 너무 가난해서 결혼을 결사 반대하는 바람에 이들은 비밀결혼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르세유에서 숨어 근근하게 살다가, 고맙게도 친척 아저씨가 죽으면서 남편인 샤를에게 연 1만 프랑의 연금을 상속해주어 부부는 한 방에 팔자가 피었다. 연금이 생기고 제일 먼저 감행한 일은 부부가 외동딸 잔을 데리고 지긋지긋한 마르세유를 탈출, 파리 교외 언덕의 깨끗한 집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이때 엘렌이 열일곱 살(오타 같음. 확인 후 수정 예정), 샤를은 스물세 살. 잔이 아홉 살쯤 됐으려나. 지금 살고 있는 트로카대로 언덕 위에 있는 4층 집으로 옮기기 전에 잠깐 바르 호텔에 머물기로 했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기쁜 마음으로 파리 구경을 하려 외출을 나갔다가 감자기 남편 샤를 그랑장이 병에 걸려 1주일 동안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숨을 거두어, 졸지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막이 올라가면 모녀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
이 작품의 문제는 딸 잔. 아이의 엄마 엘렌은 균형잡힌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는 당당하고 키도 크고, 금빛 도는 밤색 머리가 마치 해라 여신을 연상시킬 만한 미인에 건강체질이지만, 잔은 죽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병약한 체질과 격세유전으로 넘어왔는지 정신적으로 문제도 있었고 결국 결핵으로 일찍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닮아 매우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엘렌이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폭이 커서 자주 폭발하는 성격에다가 질투가 엄청나다. 아마 증조할머니 아델라이드 푸크가 중증 정신병으로 정신병원에 몇십년 간 강제 입원했던 형질도 잔을 피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 장면이 바로 이 잔이 언덕 위의 4층 과부 엘렌의 집에서 수면 중에 근육수축, 경련, 경직, 동공개방과 체온상승을 겪는 것으로 시작한다. 얼음장 같은 2월 밤. 엘렌은 하녀 로잘리를 시켜 늙은 주치의 보댕의사를 데려오라 하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직접 뛰어갔다 오는 편이 빠를 것 같다. 그래 지금 당장 입고 있는 실내복에 숄 하나만 걸치고 맨발에 실내화를 신은 채로 보댕박사 댁으로 뛰어갔으나, 박사는 임산부의 해산을 도와주기 위해 왕진을 가 새벽에나 돌아올 것 같다고 한다. 그리하여 넋이 빠진 엘렌은 그 밤에, 그것도 겨울 밤에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의사를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가 번쩍 든 생각이,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건물주이자 바로 앞에 면한 집의 주인 드베를 씨가 의사라는 것이 생각났다. 엘렌은 서둘러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에서는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35세쯤 보이는 갸름한 얼굴과 잿빛 눈, 엷은 입술을 한 잘 생긴 의사 앙리 드베를이 나타난다.
앙리 드베를의 눈앞에 몸이 눈부시게 드러난 여성이 서 있다. 숄이 흘러내려 벌어진 실내복 사이로 가슴이 노출되고, 팔도 드러났지만 정숙하고 바른 몸가짐에서 품위가 배어나오는 모습. 보댕의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앙리 드베를은 아버지 드베를로부터 150만의 재산과 상류고객을 물려받은 실력있는 의사라고 한다. 드베를의 세심한 치료와 처치로 잔은 정상을 찾아가고 그래도 불안한 엘렌은 드베를에게 밤새 환자의 곁을 자신과 함께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환자와 젊은 남녀, 이미 사랑과 정욕을 아는 남녀 둘이 아침이 밝아오도록 한 밀폐된 장소에서 있게 되는데, 첫날이라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고, 가끔 볼이 따뜻해질 정도였다. 아침이 되자 잔은 정상을 되찾아 다시 예의바른 아이가 됐고.
의사가 치료를 해준 것도 모자라 바로 옆집에 사는 건물주. 감사 인사차 방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검정드레스를 입은 모녀가 드베를가의 초인종을 누르고, 집사의 인도로 응접실에 들어가니 여주인 쥘리에트 데베를과 일곱 살 정도의 버릇없는 아들 뤼시앵, 쥘리에트의 여동생 폴린과 폴린의 아버지 르텔리애씨, 집안의 가난한 옛친구이자 노처녀인 오렐리양이 함께 있었다.
크림전쟁 전 프랑스에서 연수 1만 루블이 얼마정도의 수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렌과 잔 그랑장 집안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르주아 가정인 드베를 가문의 안주인 쥘리에트는 자유분방하고 호들갑스러우며 어떤 행사를 치루더라도 자신이 주도하고 싶어하는 외향적 성격이다. 즉 이 동네 사교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인물. 20대, 많으면 30대 초반 정도로 당시 기준에 인생의 절정기에 도달해 있는 여성. 그리하여 유혹도 많겠지. 이 가운데 한 명이 드베를 가문과 친한 잘 생긴 청년이자 독설가 부르주아 말리뇽씨. 저 뒤로 가면 언젠가는 젊은 말리뇽과 하여튼 사고 한 번 치겠다는 생각이 독자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쥘리에트 여사가 엘렌과 잔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자기 커뮤니티의 중요한 한 명으로 만들려는 듯. 그래서 이날부터 엘렌과 잔은 드베를 집안의 정원과 응접실을 무람없이 드나들 수 있는 권리, 자격을 갖게 되어 쥘리에트와 더욱 돈독한 정을 나눌 수 있고, 동시에 합법적으로 남편 앙리 드베를 씨와 열정적인, 간혹은 불타는 정염의 눈길 살짝 나눌 수도 있었다.
소설에서 이런 사전 작업이 몇 페이지에 이르면 당연히 언젠가는 한 번 화르륵 불이 붙는 법이니 독자는 기대를 해도 좋다. 개봉박두.
한편 엘렌의 집에서는 남편 그랑장이 죽을 때 미사를 집전한 주브 신부와 신부의 동생인 랑보 씨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관습이 됐다. 뜻은 엘렌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하여라는데 목적은 아무래도 엘렌과 랑보 씨를 엮어주려 하는 것 같다. 랑보 씨가 비록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사람이 진중하고, 친절하고, 진지하며, 하여간 작품이 끝날 때까지 상당한 신사로 어디 한 군데 까탈을 잡기 어려운 신의 있고 점잖은 사람 중에서도 점잖은 사람이다.
엘렌도 랑보씨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연인이나 남편감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남자, 편한 남자, 속상한 거 있으면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정도로 생각해 그의 청혼에 대한 대답은 무기 연기 중이다. 랑보씨도 십년이 지날지라도 그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묵묵히 견디고 있다.
어때, 소설 읽은 짬밥으로 보면 결국 이 커플이 이루어지겠지? 물론 지지고 볶는 과정을 다 극복하고 나서. 안 알려준다.
근데 이번 주 화요일 식사 후에 주브 신부가 엉뚱한 말을 엘렌한테 한다.
“가난한 교구민 페튀 할멈이 아주 아픈 모양입니다. 문안 한 번 가면 좋아할 거예요.”
그리하여 엘렌은 다음 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진흙길을 따라 허물어져 가는 외딴 집에 들르는데, 정말 해골 같은 할멈이 얼굴만 퉁퉁 부은 모습으로 엘렌을 보자마자 궁상스런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때맞춰 드베를 의사까지 집에 들어온다. 아마도 드베를 의사가 아직 젊어서 정의로운의사협회 회원 정도 되는 모양이다. 할멈이 보기에, 엘렌이 먼저 무너져가는 집에 들어오고 이어서 곧바로 의사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척 보니 둘이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가 확실한데 좋은 쪽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로 보인다. 속으로 꿍얼거렸겠지. “내가 나이가 몇 갠데, 척 보면 알지.” 그리하여 두 사람에게 외치다시피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 두 분은 잘 어울려요. 내가 그런다고 언짢아하지 마세요. 그게 사실이니까.”
이 페튀할멈. 잉글랜드의 디킨스 소설에 나와서 극을 전격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잠깐의 역할, 소위 트리거 역이다. 할멈의 활동영역이 (연인들이 한 달 정도 방을 빌려 러브호텔로 쓰기도 하는)자기집 부근, 성당과 공동묘지 인근이다. 이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수십년 동안 발달시켜온 눈치 하나로 온갖 사람들한테 부정과 불륜과 기타 등등을 마치 관심 없는 척하며 지도 편달하는 데 도가 텄다. 그래 눈치 하나는 9단 정도. 이 할멈은 성당 계단 밑에 앉아서 벌써 쥘리에트와 말리뇽이 이제 익을대로 농익어 손만 대면 톡 터질 정도라는 것도, 엘렌과 앙리 드베를 역시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것도 훤하다.
하지만 할멈도 몰랐겠지. 엘렌과 앙리 사이에는 절대의 장벽, 자신의 질병이 오히려 더 그들을 감시하고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무기로 삼는 잔이 있다는 것을.
지나가면 다 한 시절, 한 페이지일 뿐이다. 삶도 한 페이지, 사랑도 한 페이지. 이제 석양이 물든 파리를 내려다보며 한 시절, 한 사랑이 다 간 것을 그저 내려다볼 수 있을 때까지, 소설은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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