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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동기담 / 스미다 강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40
나가이 가후 지음, 강윤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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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묵동기담.” 나는 제목이 싫어서 그동안 읽기를 미루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세계문학 시리즈인 대산문학총서 140번 작품이었지만. 전쟁 전 일본 작가들이 자주 쓰는 귀신 나오는 ㅆㄴㄹ 소설일 것 같아서. 일본 어느 지역에 묵동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곳 수풀이나 음산한 절 또는 사당 같은 곳에 사는 3백살 넘은 노파나 중 혹은 귀신들이 창궐하는 이야기일까봐 그러니까 ‘묵동’이 문제가 아니라 뒤의 두 글자 ‘기담’이 문제였다. 기담奇譚. 이상하고 야릇한 이야기. 이런 거라면 그저께 읽은 정보라의 <저주 토끼>로 너무 충분했으니 새삼스레 또 읽을 필요가 없잖아? 근데 오직 대산세계문학총서라는 것 때문에 책을 꺼내 눈에 힘을 주고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봤더니 <묵동기담濹東綺譚>이라 쓰여 있더란 것. 기담의 ‘기綺’가 기괴하다 할 때의 기가 아니라, 비단, 문채, 고울 기. 그래서 더 알아봤더니, PC에서 프린트할 때 지원이 되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묵濹 자는 네이버 사전에 뜻이 없고 발음 ‘묵’만 내주는 단어인데, 일본 도쿄를 흐르는 스미다 강변을 노래할 때 자주 쓴 한자란다. 그냥 스미다 강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그럼 됐다. 스미다 강변은 아니고 스미다 강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의 기담, 비단 이야기. 비단으로 지은 옷은 누가 입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지은 예쁜 소설 <비단>에서 치명적으로 어여쁜 일본의 아가씨가 비단옷을 입잖아? 그 젊은 아가씨가 늙은 비단 패밀리 보스의 정식 아내는 아니고. 맞다. 일본의 화류계 아가씨들이 입는다. 그러면 제목 ‘묵동기담’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1879년에 도쿄에서 내무성 엘리트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나가이 가후는 어린 시절 엄마한테 노래와 악기 연주 특히 샤미센에 재미를 붙였다. 위키피디아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데, 하이틴 시절에 병원에 입원해 몇 달을 보낸 후, 훗날 작가가 되는 친구와 함께 홍등가로 본격 진출한 모양이다. 이렇게 사는 바람에 당해년도에는 대학에 갈 수 없어서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갔다가 돌아와 도쿄 외국어 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작품을 쓴다. 이 정도만 알면 되리라.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청소년이 홍등가를 드나들었으니 이게 공무원 집구석에서 가당한 일일 수가 없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가이는 그 시절의 즐거움이 나이가 들어도 그리웠던지 <묵동기담>에서 쉰여덟 살이 된 주인공 ‘나’ 오에 다다스로 하여금 스미다 강둑이 멀리 보이는 좁은 골목 속의 홍등가 여인을 찾아가게 만들었다.
작품은 주인공 ‘나’의 일인칭으로 쓰였지만 독후감은 오에 다다스, 3인칭으로 쓰겠다.
오에는 활동사진을 좋아하지 않아 1897년경 극장 간키칸에서 샌프란시스코 시가지 광경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관동지진이 있었던)1923년 이후에는 영화 말고 극장 간판을 유심히 보면 이미 영화의 스토리를 대강 다 알 거 같아서 간판 구경하는 것에 취미를 붙였는데,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도쿄 시내를 거닐다보니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유곽 진입로였다. 지진 전만 해도 유곽의 아가씨들과 삐끼들이 지나가는 행인의 모자를 빼앗아 손님을 거의 강제로 끌어오는 거친 행동도 했지만 이젠 순사 파출소에서 엄히 단속해 그런 경우는 없다. 그래도 삐끼는 여전하다. 이 동네에 유곽과 관련없는 유일한 곳이 헌책방. 오에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그곳에 들러 오래 묵은 잡지 한 권을 둘러보고 있던 차, 예순 살은 먹어 보이는 사내가 보따리를 하나 가지고 들어오더니 무늬가 자잘하게 들어간 홑겹 옷과 소매와 몸통 부분을 서로 다른 천으로 만든 나가주반(전통 부인복에 사용하는 질기고 고운 비단)을 꺼내 보인다. 자, 기綺, 비단 나왔다. 오에는 별 생각없이 헌잡지 몇 권과 충동적으로 나가주반을 샀다. 통속소설의 표지를 싸면 좋을 것 같아서.
헌책방에서 나와 길을 걷는데 순사가 오에를 부르더니 파출소로 연행해간다. 불심검문. 군국주의 일본에서 순사의 취조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이를 위해 오에는 지갑 속에 인감증명과 호적초본을 가지고 다닌다. 이 두 개를 확인한 순사가 몇 시간에 걸친 취조를 마치고 방면하는데, 오에가 파출소를 나서며 하는 말이 “애초 헌 옷은 재수없는 물건이야.”
오에가 순사들한테는 밝히지 않았지만 직업이 작가다. 쉰여덟 살. 메이지 12년 기묘생. <실종>이라고 제목을 붙인 소설을 구상했다. 다 쓰면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 되리라는 약간의 자신감이 든다.
극이라면 극중극이다. 소설이니까 작중작이라면 되겠다.
주요인물은 다네다 준페이. 쉰 살 정도. 사립중학교 영어교사. 아내 죽고 3~4년 후에 미쓰코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미쓰코는 정치인의 집에서 안주인의 몸종으로 지내다가 주인에게 속아 아이를 임신했다. 다네다의 친구이기도 한 집사 엔도가 일을 처리하기로 해서, 만일 미쓰코가 아이를 낳는다면 20년간 양육비조로 월 50엔을 줄 것이며,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면 상당한 수준의 지참금까지 주겠노라, 단, 아이는 절대 이 집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홀아비 친구 다네다한테 찾아가 아이 하나 달린 어여쁜 여자하고 결혼만 했다 하면 팔자가 핀다고 꼬드긴다.
이렇게 혼인을 해 들어온 아들 다메토시에 이어 다네다의 딸 요시코, 아들 다메아키를 키우며 산다. 20년 후, 주인집에서 양육비를 딱 끊어버리자 이때부터 대학과 고등학교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의 학비며 생활비를 대기 위하여 다네다는 야간학교 두세 군데에 더 강의를 맡아야 할 지경이었다.
다메야키는 운동선수가 되어 나중에 서양으로 나가 살고, 요시코는 배우 중에서 그냥 배우가 아니라 은막의 스타가 된다. 문제는 이렇게 성공하기 전에, 다네다가 피곤을 무릅쓰고 집에 들어가면, 그동안 일본 불교 특정 종파에 들어간 아내는 신도를 모아놓고 집구석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첫째 아이는 울퉁불퉁한 청년들을 모아 집이 들썩들썩하고, 요시코는 쭉쭉빵빵한 아이들을 데려와 날마다 파티를 여는지 도무지 시끄러워 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참다 못한 다네다는 쉰살이 되어 직장에서 퇴직하는 날 퇴직 보너스를 챙겨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잠적해버리고 만다. 전차에서 우연히 전에 자기집에서 하녀 일을 하던 현직 카페 접대원 스미코의 집에서. 처음부터 그런 사이가 되려는 건 아니었는데, 사정을 털어놓고 딱 하루만 신세를 짓자고 했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여기까지 구상했고, 이후 어떻게 이야기의 결말을 지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
작가 오에는 머리 속으로 별의별 구상을 해가며 초가을 저녁 산책에 나섰다. 근데 난데없이 소낙비가 우다다닥 내리친다. 일본의 초가을은 날씨가 사납다. 태풍도 겁나게 자주 오고, 소나기는 말할 것도 없다. 오에는 그래서 우산 없이 외출하는 법이 없다. 우산을 활짝 펴고 서 있는데, 이때 우산 속으로 불쑥 들어오는 전직 우츠노미아 게이샤 출신의 유녀 오유키. 오에는 시간도 많고, 어렸을 때부터 유녀 다루는 것도 익숙해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유키를 폭포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그이의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 오유키가 사는 곳? 다다미 몇 장짜리 작은 방 두개와 부엌 등이 있는 2층집. 당연히 영업집이다. 유곽.
오에는 소낙비에 홀딱 젖었다. 미장원에서 방금 나온 오유키를 덜 젖게 하기 위해 우산을 그쪽으로 더 쓰게 했으니 완전 물에 빠진 꼴이었겠지. 오유키가 말한다. 옷을 좀 말려야 하겠으니 벗으시고 다른 걸로 갈아 입으세요. 오에? 당연히 유곽의 예법을 안다. 이 집에 있으면 있는 시간만큼 오유키의 영업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오에는 오유키에게 돈을 건네며, 한 시간 정도로 치면 되겠지요?
이후 오에는 처음엔 거의 매일 오후가 되면 이 집에 들러 밤이 될 때까지 쉰다. 말 그대로 쉬기만 했는지 쉰다는 핑계로 다른 것도 했는지, 전쟁 전의 소설이라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할 건 다 했다고 봐야겠다.
나중에는 오유키가, 주인한테 빚 다 갚으면 나를 데리고 살아줘요, 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친해진다. 그러나 선수 오에는 이런 여성들이 진짜로 집안에 들어와 위협에서 벗어나면 갑자기 삶이 자유로워져서, 세상의 게으름뱅이에 나태한 주부가 되는 걸 자주 봐, 애초 그럴 마음은 없다.
나이도 있고, 소설도 계속 써야겠고, 해서, 오에는 나중엔 3, 4일에 한 번 그러다가 한 주일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점점 멀리하기 시작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처럼.
오유키. 그저 낡은 비단, 나가주반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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