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부자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6
존 업다이크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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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980년의 해리 래빗 앵스트롬. 40대 후반, 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래빗에게도 이런 날이 온다. 전작 30대 후반의 래빗이, 마누라는 다른 놈하고 눈 맞아 도망가고, 해고도 당하고, 집은 불에 홀랑 타버린 상태였는데 그새 부자가 됐다고? 로또 한 방 맞은 거 아니냐고? 미국 로또는 우리와 달라 한 번 당첨되면 1조원이 넘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데. 아니면 인생의 위기를 맞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대오각성을 하고 빨간 손에 쥔 것도 없이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려진 100달러짜리 지폐를 라면 박스로 몇 박스 모았냐고? 에이, 그럴 리가. 엉망진창으로 살지만 그나마 착한 루저, 해리와 극적으로 화해한 아내 재니스. 때마침 잰의 아버지 프레드 스프링어 씨가 이제 나이가 들어 자기 재산을 자연스럽게 물려 받을 후계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하나밖에 없는 딸 재니스가 물려 받아야 하겠지만 스프링어 모터스를 운영하기에는 예쁜 얼굴에 비해 너무 돌대가리라서 마음에 차지 않는 사위, 해리 앵스트롬한테 수석 판매원의 자리를 주어 경영을 전담하게 했다.

  근데 사위 역시 문제가 있다. 딸 재니스의 바람 상대가 바로 중고차 수석판매원인 그리스 남자 찰리 스태브로스였던 거다. 이제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딸 내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사위를 수석 판매원 자리에 앉혔는데, 이게 웬일, 해리 래빗과 찰리는 일본차 도요타의 판매와 중고차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스프링어 모터스에서 그렇게 쿵짝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될 줄이야. 사위 입장에서는 바람직하게 장인 스프링어 씨가 5년 전에 의자에 앉은 채 곱게 세상 하직해서(해리의 두 부모도 지난 10년 동안 차례로 세상 떴다), 유언장에 나온 대로, 스프링어 모터스의 지분 50퍼센트는 스프링어 부인이 차지하고, 나머지의 절반씩 뚝 떼어 딸 재니스와 사위 해리가 소유하게 된 거다. 경영은 당연히 세상물정 좀 알고, 사는 것도 좀 배웠다고 주장하는 해리 래빗 앵스트롬이 가졌다. 아무리 사위라도 사위 명의로 25퍼센트의 주권을 건네기는 쉽지 않았을 듯. 물론 래빗이 애초에 원하지 않았지만 살던 집이 불에 홀랑 타버리는 바람에 아내와 화해하자마자 곧바로 처가집에 들어가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살았거든. 그동안 귀염을 받은 모양이지. 래빗 주제에 무슨 대오각성. 하긴 대오각성을 했더라도 작심삼일이었을 터, 칫.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돌아온 토끼>에서 가출한 동북부의 귀한 집 처자 질의 죽음 때문에 극적으로 사이가 갈라져 “내가 아빠를 죽이고야 말겠어!”라는 악담까지 남긴 래빗의 아들 넬슨은, 그 사이에 10년이 지났으니 이제 대학생이다. 오하이오 주 켄트에 있는 켄트주립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아빠를 닮았으면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스포츠, 특히 농구도 잘 할 텐데 하필이면 외탁을 하는 바람에 키도 작고, 생기기는 귀엽지만 별로 내세울 것 없이 내성적인 외골수 성격의 넬슨은 잠깐 히피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20대 초반인데, 폭발할 지경의 리비도의 명령으로 연애를 하기는 했는데, 주립대학의 그저 그런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는 대신, 서무과의 타이피스트 프루 양과 교제를 해 프루 양의 뱃속에 자기 씨를 착상시켜버리고 만다. 학교에서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넬슨은 이제 일년만 더 공부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기 위하여는 전혀 필요 없을 학사 학위를 딸 수 있는 마지막 학년에, 프루와 사람들이 참하다고 오해하는 맬러니라는 이름의 히피 아가씨와 함께 콜로라도에 놀러가 행글라이딩 같은 걸 즐기다가 돈이 다 떨어질 즈음, 프루 대신 맬러니와 함께 집에 도착하면서 사사건건 서로 얼굴만 보면 복장이 터지는 부자관계의 막을 올린다.

  넬슨은 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부자간에 서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대화는 무슨 대화. 그렇다고 이들이 십년 전 넬슨의 말대로 아빠를, 아들을 진짜로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둘 나름대로 아빠한테, 아들한테 인정받고, 될 수 있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그렇게 보이기만 해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집에 오면서 왜 넬슨은 자기 아이를 임신한 프루 대신 맬러니와 함께 왔을까? 집에 있는 할머니, 부모는 당연히 맬러니가 넬슨의 애인인 줄 안다. 심지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할머니는 자기 집 안에서 넬슨과 맬러니의 육체적 교접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지하실 또는 봉제실에서 머물게 하겠다고 각오가 대단하다. 아직 모르니까. 넬슨과 맬러니는 그냥 친구.

  왜 맬러니와 함께 왔을까? 맬러니는 콜로라도에서 잠깐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 당시 청춘답게 코카인을 코로 흡입하고, 대마초를 열심히 피우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순한 복용자라서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걸로 보인다. 하여간 어떤 문제인지 책이 끝나지 않을 때까지 이야기가 없으니 우리도 그냥 넘어가자. 두번째로, 넬슨은 자기가 학생이 아닌 서무계 타이피스트와 연애를 하고, 그 아가씨를 임신시켰다는 걸 가족, 특히 아버지한테는 숨기고 싶었다. 세번째로, 임신한 프루 입장에서 넬슨 혼자 집에 보냈다가는 마음이 바뀌어 배째라고 나설 수도 있어서 자기의 절친이며 넬슨하고는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맬러니를, 넬슨 감시역으로 동반시키고자 했던 거였다. 이렇게 되면 세 명의 청춘들 입장이 다 정리가 된다. 맬러니는 채식주의자이며, 선불교나 요가 같은 신비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만 스프링어 집에서는 어른들 눈에 세상 깔끔하고, 화단 가꾸기도 능숙하고, 육류를 제외한 조리와 설거지를 자발적으로 할 줄 아는 참한 아가씨이다. 완고한 할머니조차 며칠이 지나자 맬러니가 넬슨의 짝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 그러나 아직 이 집의 할머니와 부모는 여자와 남자가 친구 상태로 머무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연애-섹스-결혼-출산과 출산 이후 이혼은 옵션이라는 하이웨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전통과 경험 위에서만 존재하니까.

  하지만 넬슨과 맬러니는 정말로 친구다. 연애와 결혼 같은 생각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서로 마리화나를 하고 코카인을 약하게라도 흡입해서 분위기가 삼삼해지면 뭐 그냥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구태여 참지 않고 한 번 한다. 이때 얘네들의 나이 23세가량. 때는 1978, 79년이니까 1950년 후반 출생 세대이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대 정부 투쟁을 하다가 둘의 모교인 켄트주립대학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학생까지 생겼던 시기와 근 10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아직 당시를 풍미하던 히피와 자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


  <토끼는 부자다>에서 해리 래빗이 부자가 된 사연을 말했고, 가장 큰 주제는, 이제 아들 넬슨이 토끼 시리즈의 첫 작품 <달려라 토끼> 당시의 해리 나이가 되었으며, 아버지한테 당당하게는 아닐지언정 자기 생각을 과격하게 도전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해, 본격적인 갈등의 시절을 맞았다는 것. 넬슨도 아빠 해리와 비슷하게 젊음의 혼돈과 폭풍과 방황의 시절을 보낸다. 물론 조금 다르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으로. 딱 그만큼.

  넬슨은 아버지의 사업체인 스프링어 모터스를 언젠가는 물려받고 싶다. 중고자동차 판매와 도요타 자동차 대리점 사장을 하기 위하여 켄트대학 지리학과 학사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넬슨은 이제 한 여자의 남편과 한 아이의 아빠 역할, 즉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하여 학교를 때려 치우고 어차피 물려받을 스프링어 모터스에 취직하여 일을 배우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할머니와 엄마, 외갓집 식구들이 동의하는 반면, 아빠는 아들 넬슨이 이깟 대리점 말고 더 큰 무대에서 날개를 피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학위를 얻기 바란다. 넬슨을 채용하여 상당한 급여를 지불하려면 10년 전부터 최상의 파트너였던 아내의 전 불륜상대 찰리 스태브로스를 해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친해졌고, 찰리의 인맥과 판매 실력 없이 대리점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프링어 가문의 힘, 75퍼센트의 주권은 기어이 웃으면서 스태브로스를 해고하기에 이르고, 넬슨이 그 자리에 들어와, 기발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프로젝트만 펼쳐 놓은 채, 이미 찰리 스태브로스와 함께 플로리다와 아이오와 여행을 떠난 적 있는 맬러니를 데리고 켄트주립대학에 복학해버린다. 즉 계획에 실패하고 다시 학교로 도망했다. 프루가 병원에서 딸을 순산하고 넬슨이 얼른 돌아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바라는 동안에. 어째 하는 짓이 해리 래빗 앵스트롬, 아비를 그렇게 빼 박았는지 원.

  여기에 하나 더. <달려라 토끼>에서 두세달 간 래빗과 동거하던 커다란 몸집의 여자 루스라고 있다. 초장에 한 젊은 커플이 매장에 와서 차를 보고 간다. 저 뒤에 가면 남자가 도요타 차 한 대를 구입한다. 이때 같이 온 아가씨가 아무리 봐도 루스를 닮은 거 아니냐는 말이다. 나이든 정도를 보니 어머나, 해리는 머리칼이 쭈볏 선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뭐랄까, 그래, 사랑의 감정. 이 아가씨가 혹시 루스와 해리 사이에서 나온 자기 딸 아닐까? 이별 당시 루스는 분명히 임신 상태였고, 헤어졌으며, 곧 나이든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낳았다거나 임신 중단을 했다는 다른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물론 신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근데 갑자기 나타난, 옛 시절 루스를 꼭 닮은 아가씨를 보니 영낙없이 자기를 닮지 않느냐는 말이지. 그리하여 괜히 이 이야기를 아내 재니스한테 했다가 얻어 터지기만 해서 이름을 모르는 자기 딸과 옛 애인 루스를 찾아 시골지역을 헤매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아가씨도 왠지 해리가 좋아 다른 차를 사고자 하는 남친을 설득해 결국 도요타를 샀기에 이르고.


  하나만 더?

  이제 중산층 계급에 진입해 안정적으로 정착한 해리와 재니스 부부는, 골프 회원권을 보유해 남편은 골프를 아내는 테니스와 야외 수영을 하며 계급간 우정을 돈독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당연히 서로 조금씩이나마 좋고 싫고는 있지만 중산층답게 그런 건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당연히 드러내지 않더라도 서로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지만.

  원래 속물인 해리는 이 가운데 웹의 젊은 아내 신디한테 미쳐있다. 젊었을 때처럼 무작정 달려들 정도는 아니고 손바닥 만한 삼각형 세 개로 만든 비키니에 싸인 몸을 언젠가는 한 번 이상 해체시켜 관계를 갖겠다는 비 범죄적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때는 1970년대가 막 끝난 1980년. 저 변방 극동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몇 백 명이 죽어가던 해, 미국 중산층 세 부부는 비행기를 타고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섬에 도착해 시간을 죽이다가 자연스럽게 짝 바꾸기, 소위 스와핑을 시전하는 것. 그러나 순서는 해리의 속셈과 달리 첫날 셀마, 다음날 꿈에도 그리던 젊은 신디로 정해졌지만, 셀마와 잊지못할 의미를 지닌 하룻밤을 지내고 이제 날만 어두워지면 드디어 신디와 어제와는 비교하지 못할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건만, 그러나 아뿔싸, 몇 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다시 넬슨이, 진통을 시작한 프루를 보고 겁을 덜컥 먹었는지 맬리사를 불러 둘이 함께 켄트대학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겁을 한 장모의 호출을 받고 만다.


  이런 내용이다. 시작은 70년대 석유파동부터 달러화 폭락, 일본차의 세계정복, 엔화 강세의 경제현장. 곧이어 변해버린 세대간의 갈등과 단계적으로 속화되는 미국 문화 같은 것.

  매우 재미있다. 그러나 순전히 재미 측면으로 보면 <돌아온 토끼>보다 덜하다. 암만해도 그만큼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오히려 긴박한 사고와 죽음의 장면이 없어서 좋을 수도 있다. 사실 <돌아온 토끼>에서는 갑자기 집에 들어온 흑인 약물남용자 스키터의 행위가 너무 거칠어 알러지 현상이 생길 정도이지 않았나 싶었거든.

  읽어보실 분은 조심하기 바람. 점잖은 분들은 특히 더. 아주 적나라한 장면이 필터 없이 가끔 쏟아진다. 외설과 예술 사이? 아니, 아니. 외설을 포함한 예술 수준. 읽어보시면 안다. 집 책장에 꽂아놓으면 언젠가는 호기심 넘치는 귀댁의 자녀들이 뽑아 읽고 터져버릴 것 같은 리비도를 이기지 못해 얼굴을 붉히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닥쳐도 너무 걱정 마시라.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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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11-09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설과 예술 사이? 아니, 아니. 외설을 포함한 예술 수준. <- 이렇게 눈에 확 들어오는 멋진 평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Falstaff 2025-11-10 04:25   좋아요 1 | URL
전형적인 미국 속물 백인 쁘띠 부르주아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페미니즘과 가까운 분들은 틀림없이 열 받을 만한 책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ㅎㅎㅎ
가능하면 1부 <달려라 토끼>부터 <토끼 돌아오다>을 읽은 다음에 3부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3부는 뭐 그냥 읽어 치운다고 해도 4부 <토끼 잠들다>는 전작 독서가 없으면 확실히 곤란하니 애초에 1부부터 읽어두시는 게 깔끔할 듯합니다.
다시 강조해요! 주인공 해리는 한 작품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속물, 이기주의에 자기만 알고, 여자에 환장을 한 바람둥이, 뭐 그런 잡놈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