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문 - 1996년 부커상 수상작
그레이엄 스위프트 지음, 손영도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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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스위프트, 1949년 5월생이면 지금 76세. 연식이 꽤 됐는데도 위키피디아에 자기 프라이버시에 관해 별로 밝히지 않았다. 영국 남부 출신이고, 사립 기숙학교인 덜위치 칼리지를 졸업한 걸로 보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집에서 자란 것 같다. 우리한테도 알려진 소설가 가운데 레이먼드 챈들러와 <영국인 환자>를 쓴 마이클 온타치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책의 앞날개를 인용하면,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장학금을 받아 요크대학 영문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학위를 받지 않은 상태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경비원, 농장 노동까지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데, 아마도 잠깐 그런 일도 했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교사로 일하며 글을 썼다니까. 1983년에 발표한 <워터랜드>가 영화화되면서부터 돈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부커상 숏리스트까지 올라갔다가 미역국을 먹었고, 이후 13년이 지난 1996년에 오늘 소개하는 <마지막 주문 Last Orders>로 기어이 부커상을 받았다.

  이 책은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냈다. 대개 대학 출판부에서 낸 작품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미없다는 거. 고대출판부에서 나온 책 가운데 재미없게 읽은 것이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 페터 바이스가 쓴 <소송, 새로운 소송>, 몰리에르 희곡 <아내들의 학교>, 카베사 데 바카의 <조난 일기> 외 몇 권이 더 있는 거 같은데 하여간 재미있게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시 전문 상업 출판사가 재미난 거 다 채 가고 남은 것들만 대학 출판부 손에 떨어지는 거 아냐? 이 대학만 그런 게 아니고 웬만한 대학 출판부에서 낸 책들이 어찌 그리 알뜰하게 재미가 없느냐고.


  런던의 런던탑과 빅벤 맞은편 버먼지 스미스필드는 정육업 때문에 피투성이의 중심으로 이름을 냈다. 삶과 죽음 그 자체라서 이 거리에 세인트바트 병원이 있고 예전엔 정기적으로 참수형과 교수형을 집행하던 뉴게이트 교도소 자리에 중앙형사법원이 들어선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 물론 영국인, 특히 런던 사람이라면 말이지만. 1903년 이 거리에 도즈 선생이 가족 정육점을 열어 옥호를 “도즈 부자의 가족 정육점”이라 했다. 여기서 도즈 부자라고 함은, 돈 많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아빠와 아들을 말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잭 아서 도즈 씨였다. 처음부터 잭이 정육점 주인, 조금 나쁜 말을 쓰면 푸주한이 되고자 한 건 아니었다. 길 건너에 있는 세인트바트 병원에 유난히 예쁜 간호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 자란 사춘기 시절 잭은, 의사 한 명이 서너명의 간호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나도 열쒸미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말 거야, 각오를 다졌건만 당연히 메스 대신 발골도를 쥐게 되었다.

  잭이 정육점 2대 사장이 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설명하자면, 젊음이 탱천할 시기에 집에서 토껴 홉 농장에 가서 홉 따는 일까지 했다. 물론 한 해 잠깐. 여기서 잭은 따라는 홉 대신에 아름다운 에이미 아가씨를 만나 보자마자 홀랑 반해 눈이 휘까닥 뒤집힌 김에 결혼을 해버렸다. 그리고 딸을 낳아 아이 이름을 ‘준’이라 했다. 이후 곧 2차세계대전 발발. 잭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한 발 일찍 입대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했다. 6개월 후, 어떻게 되느냐고? 죽어? 다쳐서 돌아와? 아니다. 반년 후에 같은 부대에 영국인 시각으로 난쟁이 반바지만 한 조그만 키의 병사가 전입 온다. 그래서 너는 어디서 왔냐? 물어보니까 글쎄 버먼지 스미스필드 출신이라는 거 아냐? ‘도즈 부자의 가족 정육점’에서 한 골목 꺾으면 바로 나오는 고철 수집상집 아들이었던 거다. 그래서 어제 읽은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의 주인공 레니와 조지처럼, 소대가 작전을 나가면 무지하게 덩치가 좋은 잭이 난쟁이 반바지 레이의 앞에 서서 수색을 했는데, 만일 잭이 레이를 만나자마자 자랑삼아 지갑 속 아내 에이미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레이 역시 단박에 에이미한테 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레이가 앞장서서 수색을 했을 거라고 먼 훗날 레이가 추억한다. 잭이 총에 맞아 죽어주면 지갑과 사진을 갖고 버먼지의 정육점에 가서 에이미에게 우짜고저짜고….

  근데 잭과 에이미가 낳은 딸 준은 안타깝게도 정신지체를 갖고 태어났다. 준이 스물일곱 살이 되도, 쉰 살이 되어도 두 살배기 지능에도 미치지 못하는 운명이다. 전쟁터에 보병부대 소총수로 투입된 병사들의 평균적 위험을 감수한 잭과 레이는 서로 상대가 배려하고 결정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위험을 공유했고, 이건 죽음이 이들을 떼어놓을 때까지 진한 우정을 이어가게 했다. 이때 잭과 레이가 적군에게 당한 폭격보다 훨씬 심한 정도로 독일군 전폭기가 런던의 버먼지를 때렸다. 다행히 잭의 아빠가 운영하는 정육점도, 레이의 아빠가 운영하는 고철수집 가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무지하게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는데, 이때 집 하나가 와장창 무너지면서 젊은 엄마, 아빠가 그 자리에서 죽고, 아들아이만 하나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남았다. 당시 정신지체 딸 준을 요양원으로 보낸 잭 부부는 빈스라는 이름의 고아 소년을 데려와 성姓 도즈를 부여하고 양자로 키웠다. 서양사람들은 입양을 해도 굳이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모가 나서서 사실은 네가 입양 어쩌고 저쩌고 할 이유는 없는 법이라서 잭과 에이미도 그렇게 했건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나중에 알게 됐지만 빈스는 도즈 부부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미 가슴에 못이 콱 박힌 거 하나. 뭐겠어, 딸 준 이야기지. 엄마 에이미는 준을 요양원에 보낸 이후에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과 목요일에 면회를 갔다. 단, 40대 시절에 12주 동안 목요일에는 가지 못한 일 빼고. 반면에 잭은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고, 면회 다녀온 아내에게 준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고, 일상 대화 중에도 준은 한 번도 화제에 올라온 적도 없으며, 심지어 빈말이라도 준을 발음하지도 않았다. 이건 에이미가 잭과 준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을 만들었고, 그리하여 당연히 준을 선택했으며, 훗날 잭이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지만 의사가 배를 열자마자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즉각 다시 봉합을 하고, 대책 없음을 선언한 며칠 후에 잭이 스틱스 강을 건널 때 준의 50세 생일, 또한 반스의 40세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에이미는 한 번도 잭을 선택해본 적이 없었다. 신기하지? 그러고도 어떻게 혼인을 이어간데? 하긴, 잭은 그럼에도 다른 로맨스를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가벼운 로맨스라도. 에이미는? 안 알려줌. 난쟁이 반바지를 열두어 번 입어보긴 했음.


  여태까지 길게 쓴 것이 뭐? 그렇다. 변죽 울린 거다. 이제부터 진짜다.

  잭한테는 절친 세 명이 있다. 당연히 레이. 그리고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프로권투 미들급 선수권자였던 레니와 대를 이어 한 점포를 운영하는 장의사 빅. 레이는 충분하게 이야기했다.

  레니와 아내 존Joan 사이에 샐리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권투 시합에 나가 준결승에서 장렬한 KO패를 당한 이후 야채장사를 하는 레니는 이 아이를 잭의 양아들 빈스와 엮어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고기를 사러 벤을 운전해 장거리 출장을 갔던 잭이 블랙번 근처에서 주디라는 이름의 열일곱 살 먹은 가출 아가씨를 집에 데려와 숙식제공에 약간의 임금을 주고 직원으로 채용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건만 이제 자주 얼굴을 맞대야 하는 빈스는 당연히 주디라는 가명을 썼던 아가씨 맨디와 친해지게 됐고, 급기야 반바지 레이 아저씨의 캠핑카를 빌려 거기서 맨디와 했고, 이후 아예 캠핑카에 맨디를 살게 하고 시간 날 때마다 하더니, 맨디가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결혼해버렸다. 이 사이인지 이후인지 하여간 샐리는 지붕 쳐다보는 강아지 신세가 되어 아무 남자를 만나 사랑해버리고, 결혼해버렸다. 사기꾼에 폭력 전과가 있는 남편과 살다가, 이 왕년의 사기꾼이 단 한 명의 소유자밖에 거치지 않은 거의 신품 BMW를 훔쳐 빈스에게 팔려 했다가, 빈스가 업계의 양심을 지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다시 교도소에 가서 나랏밥을 먹게 되어 빈스에게 좋은 감정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안 사겠다면 되지 그렇다고 친구지간에, 왕년의 친구 남편을 경찰에 고발을 한다고? 이런 심정이었지 뭐.

  장의사 빅은 직업에 어울리는 옷과 태도를 평소에도 유감없이 과시하고 사는 왕년의 해군. 친구들은 빅이 자기들보다 오래 살아, 자기들이 죽은 다음에 염도 잘 먹여주고, 장례도 잘 치뤄주기를 바란다. 이걸 빅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른다. 평소 태도가 이러니 세상 사람들하고 유감 생기는 행동과 표현을 해 본 적 없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그러나 장의사라는 직업이 반은 왕족이요, 반은 문둥이라. 자신한테 쏟아지는 경멸과 경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이 세 친구와 양아들 빈스가, 잭이 죽어 장례를 마치고, 화장을 해서 이제 가로 세로 15cm, 높이 30cm가량의 판지 상자 속 플라스틱 통 안에 든 하얀 골분 상태로 이들의 단골 술집 “마차와 말들” 주점 바 위에 놓여 있다. 이제 세 친구와 입양 아들 빈스가 잭의 유언대로 그의 뼛가루를 뿌리러 가려 한다.

  잭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 에이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수신인은 에이미가 아니고 “관계자 제위”였다. 어쨌든 말하기를:

  “마게이트 잔교 끝에서 내 유골을 뿌려주기 바랍니다.”

  시절은 만우절 다음날 4월 2일. 목요일. 일찌감치 준과 잭 사이에서 준을 선택한 에이미는, 에이미의 말을 신뢰한다면, 다른 요일이면 몰라도 목요일이니 자신은 잭의 유골을 뿌리러 가지 않고 평소처럼 준을 면회하러 가겠으니, 친구 세분과 빈스가 유언을 따라주던가 말던가.

  평소 “마차와 말들” 주점의 주인 버니와 친했던 잭. 버니는 기꺼이 나머지 친구들에게 술 한 잔을 무료 제공하고 자신도 참여하지 못한 유감을 표현한다. 술 한 잔씩 들이켜니 주점 밖에 차를 댄 중고차 딜러 빈스. 그가 끌고 온 차가 벤츠 S-클래스 380. V8에 6년된 중고지만 시속 2백km까지 전혀 흔들림 없이 주행한다. 이 차를 타고 잭의 유골을 뿌리러 가는 하루를 쓴 작품.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히고 설킨다.

  그러나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 이거, 이 플롯, 어디서 본 거야,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래 궁리하기 시작. 음.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독후감 쓰려고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그레이엄 스위프트가 1996년에 부커상을 탈 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유사한 점을 들어 시비한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도 시비한 사람들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이걸 어쩌나,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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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도 부커상을 받았단 말인가요? 유사설정이 많음에도 상을 받았다는건 그만크 뛰어났단 얘기일까요?

Falstaff 2025-09-08 17:19   좋아요 1 | URL
그렇다고 봐야지요. 나름대로 괜찮은데요, 플롯은 좀 문제가 된다고 아니 말할 수 없네요.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냥 스토리 상 유사성이라고 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이런 빌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면 책이 잘 팔리는 거야 그렇다고 치고, 유명 문학상을 넙죽 안겨주는 건 좀 걸쩔지근 하지 않았나 싶은 겁니다. 상만 받지 않았어도 그리 크게 까탈을 받을 거 같지는 않다는 말씀입지요. ㅎㅎㅎ 사는 일이 다 그렇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