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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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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포 투》도 장편소설인 줄 알았다. 열어보니 여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을 실은 소설집. 전에 읽은 토울스 세 편이 거의 이 비슷한 분량의 장편소설이어서 이 책도 그러려니 했었다. 여섯 단편은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이민자 이야기부터 뉴욕을 무대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 2부 격인 중편 <할리우드의 이브>는 토울스의 데뷔작인 <우아한 연인>의 등장인물 이브가 뉴욕에서 시카고로 가는 기차를 탄 것으로 마감을 하는데, 시카고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이브가 돌연 LA까지 가기로 마음을 바꾸어 기념비적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속 이야기로 들어간다.
나는 <우아한 연인>을 그리 즐겁게 읽지 못해서 <할리우드의 이브> 역시 즐기지 못했다. 아무래도 추리, 범죄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지 이쪽 장르 좋아하는 분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여섯 단편은 흥미롭게 읽었다.
작품은 에이모 토울스가 차라리 자신의 고유 영역이라고 점 찍어 놓은 듯한 20세기 초기를 무대로 한다. 러시아 혁명 시대의 초기 소비에트 시절에 모스크바로 이주해 특유의 선함으로 남을 위한 배려의 대신 줄서기를 하다 우연한 기회에 ‘대신 줄서기’를 했다가 미국으로 이민 온 부부 이야기 <줄 서기>와, 공원에서 젊은이들 무리와 어울려 롤러 브레이드가 아닌 20세기에 유행했던 롤러 스케이팅을 할 때 삶의 진정하고도 절정의 행복을 만나는 68세의 노인이 이 사실을 배우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배신과 거짓말을 한 죄목으로 이혼을 당하는 <나는 살아남으리라>가 매우 인상깊었다. 물론 다른 단편도 재미있게 읽었다.
<할리우드의 이브>는 일단 다음으로 하고, 모든 단편을 흥미롭게 읽었으면서도 머뭇거리는 것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그렇게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가지 않아 책을 읽을 때의 공감과 격렬한 감동이 금세 휘리릭 휘발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그럴까? 아니기를 바라고, 아닐 것 같다. 단편 <줄 서기>를 이야기해보자.
1916년, 모스크바에서 100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에 푸시킨과 그의 아내 이리나가 작지만 만족하면서 살고 있었다. 부부사이에 아이는 없었어도 서로 살뜰한 애정 속에서 살았다. 혁명이 성공한 다음 해 1918년에 수도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이리나의 바람대로 살림을 마차에 싣고 무작정 모스크바로 길을 떠났다. 닷새 동안 마차를 몬 10월 8일. 붉은 광장에 도착한 부부. 이리나는 남편 푸시킨 씨에게 이 자리에 꼼짝도 하지 말고 서 있으라 다짐을 받고 사라지더니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구했다. 당연히 레닌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바람벽 높은 곳에 붙였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붉은 별 비스킷 집단공장에 남편과 자신의 일자리를 구한 이리나는 5만 제곱 피트와 5백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내 금세 노동자 위원으로 선출된 반면, 농사 말고는 도무지 무슨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남편 푸시킨 씨는 얼마 가지 못해 해고당하고 말았다.
혁명 후 노동자 시대에 해고를 당해?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집단 회의에서 공산당 선언을 적절하게 인용해가며 동지들의 사리를 고양시키는 데 각광을 드러내는 노동자 위원도 남편의 해고를 무효로 할 수는 없어서 푸시킨 씨는 체스판의 공깃돌처럼 모스크바 시내를 굴러다니기만 했다. 시계는 계속 흘러 1921년이 왔고, 다른 집 같으면 당연히 아내인 이리나가 해야 할 배급품을 받기 위하여 상점/배급소에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이리나가 출근하면서 설탕, 기름, 밀가루를 받아오라고 지시하면, 줄이 하도 길어서 이 가운데 둘 정도만 받아올 수 있었다. 그때는 다 그랬나 보다. 그래도 푸시킨 씨가 워낙 온화한 성품이라 이 줄서기에 차라리 ‘최적화된 인물’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았다. 푸시킨 씨는 온통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줄의 맨 뒤에서 모자를 벗고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하고, 앞 뒤의 주부들과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할 줄 알았다. 이게 대단한 능력인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금세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여성들과 친하게 된 푸시킨 씨.
일상이 줄 서기인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줄을 한 번 섰다가 사정이 있어 줄에서 이탈할 경우에 다시 돌아오면 어김없이 줄의 제일 뒤에 서야 했던 것 같다. 하여간 이랬는데, 하루는 어느 주부가 푸시킨 씨에게 아이가 아파 약국에 가서 약을 사 오는 동안 자기 자리에 대신 서 있어달라고 했다. 이 여성이 다시 돌아오면 당연히 제일 뒷자리로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줄의 앞뒤 모든 주부들이 푸시킨 씨에게 푸근한 호감을 갖고 있어서, 이 여성이 약을 받아와 그냥 푸시킨 씨가 지키던 자리에 들어와도 아무 항의를 하지 않았다. 여성은 감사의 표시로 푸시킨 씨에게 막대 사탕 하나를 선물했다.
푸시킨 씨가 이 막대 사탕을 원했던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자기한테 남아도는 시간 동안 친절, 아주 가벼운 친절을 베풀었을 뿐. 그런데 이후부터 이 여성 말고도 다른 많은 주부들이 대신 줄 서기를 부탁했고,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감사의 표시로 건네던 막대사탕이 작은 소시지로, 작은 소시지에서 제법 큰 소시지로, 이윽고 외투로 커졌다가 급기야 현금을 건네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쯤 되니까 공장의 노동자 위원인 이리나도 남편 푸시킨 씨의 소득 창출을 “공산주의의 또다른 성취”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에는 모스크바 주택부 국장 크라코비츠 동지가 푸시킨에게 프랑스산 샴페인 한 상자를 구하는 줄을 대신 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푸시킨 씨가 구태여 힘있는 윗분의 부탁을 거절할 필요도 없어서 그렇게 했고, 감사의 선물로 자기의 샴페인 한 병을 건네주기 싫었던 크라코비츠 동지는 샴페인 대신 나키츠키 타워스의 널찍한 아파트 한 채를 배정해 주었는데, 이게 또 모스크바 강변을 바라보는 최신 주택이었다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1929년 5월에는 내무인민위원부가 지식인 다섯 명을 체포해 신속하게 유죄판결을 내린 일이 있었는데, 이때 지식인들의 집을 수색해 책과 유인물을 잔뜩 압수해 싣고 가던 차량에서 잡지 한 권이 마침 지나가던 푸시킨 씨 앞에 툭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독자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하여간 나는, 이 일이 마침내 푸시킨 씨가 맞을 비극을 여는 일이겠거니 생각했으나, 푸시킨 씨가 잡지를 열어보고 한 눈에 마음에 들어 북 찢어 얼른 호주머니에 넣은 건 하얀색 긴 드레스를 입은 뉴욕 여자와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턱시도 입은 젊은 남자의 사진이 실린 페이지였다. 남자를 향한 여자의 미소가 너무 부러워서. 얼마 후 모스크바의 청소부를 만난다. 전직 초상화 화가. 다른 화가들이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파리로 망명했을 때 조국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머물렀다가 부르주아의 초상을 그려주던 화가라서 화가 자격을 빼앗기고 청소부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의 소원은 성바실리 대성당 그림의 국외여행국 스탬프가 찍힌 밝은 노란색 바탕의 여행허가증. 푸시킨은 화가를 위하여 또다시 몇 주가 걸리는 국외여행국의 줄을 대신 서주기로 한다.
국외여행국의 줄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손에 잡히지 않고, 가장 힘들고, 가장 넘볼 수 없는 줄이었다. 이곳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순전히 심심해서, 오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 심심해서 국외여행 신청서를 작성한, 아니지, 작성해본 푸시킨 씨. 그는 질문지의 모든 질문 사항에 과거 시골에서의 따뜻한 일을 되새겨보라는 초대장이라도 되는 듯한 생각을 했는지, 어린 시절 고향 고골리츠키에서의 토끼 잡이부터 온갖 추억을 서류 뒷면까지 빽빽하게 채웠다. 두툼한 서류의 마지막 질문. “왜 소련을 떠나려 하는가?”에 대한 푸시킨 씨의 진심과 답변은 이러했다. “그럴 생각 없음.”
줄을 서고 18일이 지나 드디어 접수 창구에 도착할 수 있었던 푸시킨 씨는 즉각 전직 초상화가 리트비노프에게 알렸고, 화가는 아침 8시에 도착하겠다고 말했음에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푸시킨 씨. 드디어 11시 35분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제출해야 했던 푸시킨 씨는 화가 대신 자기가 심심풀이로 작성한 서류를 디밀었다. 이윽고 서류심사. 딱 한 칸이 비어 있었다. 110번 질문. “가고 싶은 나라.” 시골뜨기 푸시킨 씨는 얼른 생각나는 장소가 없었다. 잠시 끙끙거리던 그는 갑자기 지갑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여자가 생각나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뉴욕시요!”
결과적으로 거의 1백대 1을 넘는 합격률을 뚫고 푸시킨 씨는 성바실리대성당 모양의 국외여행국 스탬프가 찍힌 여행 허가증을 받았고, 집에 가져가자마자 이리나는 1918년에 고골리츠키에서 모스크바로 향할 때 그러했듯이 세계의 수도에서 살고자 하는 동경을 이루기 위하여 즉각 여행가방을 챙겼고, 그동안 모스크바에서 주로 푸시킨 씨가 줄을 서서 번 자산을 현금으로 바꾸어 눈썹이 휘날리는 속도로 레닌그라드로 가서(또 어디 한 군데를 거쳐), 뉴욕행 배에 오른다. 세상을 법 없이 살 수도 있을 것 같은 푸시킨 씨는 배의 1등실에 머물며 승객과 각급 선원들에게 온갖 호구짓을 해 드디어 뉴욕에 첫 발을 딛는 순간, 그의 달러가 잔뜩 들었던 트렁크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완벽한 빈 손으로 뉴욕 광장에 선 그를 두고 이리나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와 달리 아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뉴욕의 주식시장이 가파른 추락을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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