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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리커버 특별판)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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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김인순이 쓴 해설을 보면, 이 책 《저지대》가 원래 1982년에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출판된 헤르타 뮐러의 첫번째 작품집이었는데, 정작 책이 나오기 전까지 4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한다. 당시 공산 루마니아 정권이 이 작품집을 검열하는 데만 4년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시간을 써버린 거다. 그래도 뭔가 일을 했다는 표시를 내기 위하여 루마니아 당국은 모두 열아홉 편 가운데 네 편을 삭제해버리고 나머지 열다섯 편도 대폭적인 가위질과 수정을 한 다음에 출간을 허락했다고 하니 차우세스쿠가 우정을 돈독히 했던 김일성하고 막상막하였던 모양이다. 책이 나오고 2년이 흐른 1984년에 동독 출판사에서 독일어로 제출간 되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더 세월이 흘러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헤르타 뮐러가 200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을 보고, 소비에트는 벌써 무너졌건만 그제서야 통일 독일 출판계는 어마 뜨거라 싶어 서둘러 개정판을 냈는데, 애초 삭제 당한 네 편을 원상 복귀하고, 나머지 가위질과 수정을 가한 것도 작가가 직접 가필해 원작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다시 책을 만들었다. 뭐든지 번개만 쳤다하면 그 새에 콩이라도 구워먹는 습관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즉각 작가에 의한 최종 교정본을 가져다 번역해 이듬해인 2010년에 책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이의 작품은 겨우 두 권, <숨그네>와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만 읽어보아 뮐러의 1980년대 작품은 차우세스쿠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독재와, 독재정권에 항용 따라다니는 인민의 정서상 봉건잔재로의 부정부패를 희화적으로 고발하는 성향인 줄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던 걸? 《저지대》를 읽어보니까 루마니아의 바나트 슈바벤 지역에서 유소년 시대를 보낸 기억을 적어 나갔다. 뮐러가 1953년생이니 《저지대》 속의 바나트 슈바벤 농장 역시 50년대의 루마니아 시골지역으로 생각하면 얼추 맞을 터이고, 그래도 우리나라의 70년대 초중반보다 나은 환경의 농장일 듯하다. 작품 속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경찰이나 관서에 근무하는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독일계 루마니아인들.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대화하고, 독일인들과 혼인하고, 같은 민족끼리 바람 피워, 삼각, 사각, 오각, 하여간 무지하게 복잡한 다중각 연애를 불사하는 바람에 어떤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 동네마다 소문이 파다한 커뮤니티.
1차, 2차 세계대전 때마다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주로 러시아와 소련 전선에서 싸우다 코피 터지고, 몸의 일부분을 잃고, 간혹 PTSD 증상을 겪기도 하는 남자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선 부근으로 강제적 노력봉사에 끌려갔다가 수용소에 수감되어 죽음 직전의 굶주림을 견디면서 기어이 죽음이라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하여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명 보전을 해 걸어걸어 다시 바나트 슈바벤 농장으로 돌아온 여자들. 이들은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적인 영웅들이다. 시대의 폭풍 한 가운데서 살아 남았으면 그걸로 영웅이지 더 뭐가 필요한가.
귀환한 영웅들은 그러나 그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가 죽어야 영웅의 딸더러, 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러시아 사람을 총을 쏴 죽였는지 아니? 몇 명의 러시아 여자를 겁탈했는지 모르지? 이렇게 물음으로 해서 귀환 영웅들의 뇌 속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증명해주는 과거의 동료들이자 죽기 바로 전까지의 연적이자, 어쩌면 이렇게 묻는 망자의 딸의 진짜 아버지일 수 있는 남자들. 20세기를 산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들이 미친 것이 아니라 세기가 미쳤던 거라는 걸.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강박적으로 못을 수집한다. 길 가다가 휜 못 하나를 보더라도 주워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의미 없이 벽에 박인 못을 보면 얼른 뽑아 곧게 펴 주머니에 넣고, 어쩌면 남의 작업장에 가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하얗게 반짝이는 못을 한 주먹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몇 개 슬쩍 주워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어, 화자 소녀 ‘나’의 집에는 작은 못상자가 몇 개 씩이나 있다. 할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늘 망치를 가지고 다니면서 벽이나 선반에 탁탁탁탁 못질을 해댔다. 할머니는 제라늄을 수프 냄비에 넣어 키우는 일에 몰두한다. 다른 식물도 잘 키우지만 특히 제라늄을 좋아하는 할머니. 집안 곳곳에 찌그러지고, 주워 온 고물 수준이고, 주둥이가 우그러진, 그러나 때가 새까맣게 묻은 수프 냄비는 하나도 없었는데, 이 모든 수프 냄비마다 가득 제라늄이, 가득, 말 그대로 가득,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가, 할아버지가 죽자 순식간에 시들어버리고 다시는 제라늄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혼 첫날부터 술을 잔뜩 퍼 마시고 신혼의 침상에서 뛰쳐나와 화장실로 쳐들어가 먹은 걸 몽땅 게워버린다. 그러니까 화자 소녀 ‘나’를 임신시키기는커녕 신부였던 ‘나’의 어머니의 어떤 부위의 살갗도 만지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몇 년 후 긴급하게 루마니아 의사가 불려왔을 때, 아버지는 의사 앞에서 통째로 자기 간을 토해버렸고, 그래도 죽는 데엔 실패해 질기게 살아남았다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작품을 염두에 두면 아마 뇌물을 써서 동독으로 이사까지 했을 걸? 어머니는 이들 속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 수용소에서의 생존 경험이라는 절망적 기억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한 가망 없는 희망, 그리고 진정으로 수용해본 적 없는 사랑의 결핍을 가지고 평생을 살며, 재재거리고 활발한 하나 있는 딸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야멸차게 자신의 손바닥 도장을 딸의 오른쪽 왼쪽 뺨에 찍어주고는 했다.
이렇게 사람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동안 농장 지역의 수시로 변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짐승들. 너무 많이 출산하는 개와 고양이들의 처분. 그리고 쥐. 개구리. 나비와 파리. 새들. 사용하지 않지만 절대 철거하지도 않는 굴뚝 속을 터전으로 하는 올빼미 가족. 여기에 뱀까지. 바람과 비와 눈과 안개. 이런 것들이 가난하지만 아슴하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쓰자면 마치 전원일기처럼 엷은 톤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헤르타 뮐러는 이이의 첫 작품집 《저지대》에서 수사법도 쓴다.
이런 판화들을 수록한 문자적 판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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