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비행사 피륵스 렘 걸작선 3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전대호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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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번에는 피륵스Pirxie라는 괴상한 이름의 우주 비행사를 데려왔다. 20대 초반 우주비행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서 40대 초반의 관록 넘치는 중견 비행사가 될 때까지의 열 가지 에피소드를 담은 책 《우주비행사 피륵스》.

  연이어 렘의 소설집을 읽는다. 《사이버리아드》,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에 이어 《우주비행사 피륵스》. 다음에 읽을 렘 역시 소설집 《로봇 동화》이다. 그리고 렘은 좀 쉬어야겠다. 《사이버리아드》를 읽으면서 작가의 우주적 유머에 너무 매력을 느껴 와다닥 해치운 기분. 《우주비행사 피륵스》에서도 피륵스가 생도 시절에 학교와 현장에서 치기어린 재치 만땅의 행적이 나와서 이 책 역시 독특한 유머와 장난기가 가득한 재미있는 책이겠구나, 짐작했다가, 천만의 말씀, 아니었다.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여자는 모르겠고, 남자의 20대 초반 시절, 똘끼 넘치는 시기에 그랬다는 거고, 이제 본격적으로 우주비행사 면허증을 따서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 우주운송업체의 항법사, 비행사, 그리고 선장의 직을 맡아, 직에 걸맞게 (결과적으로) 훌륭한 임무를 수행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와 《사이버리아드》를 읽으면서 나는 스타니스와프 렘이 인간보다는 기계와 인공지능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어떤 의미에서 단정해버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철저한 디지털 주의자이라고 여겼던 작가가 이번에는 또 인간의 직감, 직관, 본능, 그리고 경험과 역지사지의 법칙 즉 ‘입장 바꿔 생각하기’의 지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도대체 렘 선생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듯.

  제일 앞에 실린 작품이 <시험비행>. 졸업반인 4학년 생도 피륵스가 이제 학기를 마감하면서 시험비행용 우주선을 직접 운전해야 한다. 피륵스는 자신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괜찮은 생도 무리에 들지 못한다. 키만 훌쩍 컸지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고, 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뭐 그저 그런 수준. 그래서 일인용 우주비행선에 탑승하기 전에 다른 생도들이 거의 다 그렇게 하듯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커닝페이퍼를 만들어 소매 속에 숨겼다.

  임무는 우주왕복선 두 대를 인도하여 삼각 편대로 달에 접근, 루나 패스파인더처럼 일시적 적도 궤도로 달에 진입해 인도된 두 우주왕복선의 궤도가 제대로 진입했는지 확인한 후 독자 결정 항로와 가속도로 궤도로 이탈해 귀환하는 것이다. 본문은 더 복잡하다. 요약한 것이 이 정도.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주왕복선 선두에 서서 왕복선 두 대를 달 궤도까지 인도해주고 혼자 돌아오는 것.

  근데 무슨 커닝페이퍼가 필요하냐고? 우주선 앞에 계기판이 얼마나 많고, 화면이 또 얼마나 많은 지 모르시지? 나도 모른다. 중력가속도 g가 9.8미터*초제곱인데 시험비행에서 유지해야 할 가속도가 2.2g, 앞으로 비행사를 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가장 가혹한 조건에서는 거의 6에서 7g까지 경험해야 할 터이니 영화 같은 데서 낭만적으로 우주 공간을 보는 유리창 같은 걸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아마도 스크린이 대신하지 않을까 싶다. 스크린을 포함한 모든 계기판과 관련 지식을 생도가 전부 알 수는 없을 테니 커닝페이퍼를 가지고 탑승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생도 사랑이 참 자상하다.

  이제 정말로 우주비행선에 탑승해 복잡한 통로를 거쳐 조종실로 이동해 드디어 조종석에 앉았다. 지름 3미터의 유리 고치라고 표현하는 곳. 조종석과 조종간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하는데 당연히 생략한다. 하여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2.2g로 발진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가슴과 두개골이 고무의 탄력과 유사한 압력에 짓눌리면서 시야가 어두워진다. 가속도 때문에 그렇다. 전투기가 5g를 넘으면 조종사들이 간혹 기절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지? 그러나 시야가 어두워지는 건 순간, 잠시 동안. 무자비한 압력이 전신을 계속 누르기는 하지만 시각은 점차 회복되고 모든 비디오 스크린들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피륵스는 탁, 기겁을 한다. 커닝페이퍼가 어디 있지? 소매 속에 숨겨놓은 것이 가속도 때문인지 툭 떨어져 조종석 밑에 끼어 버렸다. 그런데 이 순간 정상궤도에 들어서기 위해 이번엔 -3g로 역가속을 해야 했다. 성공. 이제 우주선은 원래 지점 부터 고도 2400킬로미터 상공에 떠 있다.

  바로 이때 귀에 들리는 붕붕 소리. 크게 들리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붕붕 소리. 오, 주여. 합선인가? 화재? 공산권 우주비행학교라 예수도 믿지 않으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드디어 소리의 주인공이 눈 앞에 다가왔다. 우주생명체? 이때의 피륵스를 우주인이라고 하면 이 생명체 역시 우주생명체라고 할 수 있겠지. 거대한 파리 한 마리. 지구에서 피륵스 모르게 피륵스와 함께 우주선에 탑승해 우주생명체가 되어, 이제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이라 믿지 않을 수 없는 추한 녹갈색의 큼지막하고 성가시고 멍청한 동시에 약삭빠르고 교활한 파리.

  앗. 그런데 파리 한 마리가 아니네? 순간적으로 번식했나? 이렇게 잠시 생각했다. 확실히 큼지막한 파리 두 마리다. 그런데 비행목적상 무려 4g로 가속했다가 다시 2g로 감속하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이 두 마리의 파리가 교미까지 해버린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때 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모르겠고, 20세기 자동차운전면허 시험장의 차들은 거의 폐차 직전의 고물이었다. 생도를 위한 시험용 우주선 역시 고물 중에서도 상 고물. 거의 폐선 직전 수준이었을 것임은 20세기를 겪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터. 피륵스가 교미 중인 파리를 바라본 순간, 하필 이 파리들이 피복이 벗겨진 회로,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에 앞발을 턱 올려놓고, 흠흠, 즐기고 있는 거였다. 이 왕파리들이 만일, 진짜로 만일 몸을 조금 흔들어 합선을 일으키면 회로 차단기가 전류를 끊을 터이고, 파리는 감전사할 것이며, 그러면 다시 전력이 복구될…희망의 몰아지경에 빠지는 피륵스. 희망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일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갔다.

  섬광이 번뜩하고, 등이 꺼지고, 일시적 정전이 1초도 지속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퓨즈가 나가면서 완전한 암전. 다시 전력이 들어왔고 또다시 암전. 눈을 부라리니 두 전선 사이에서 타 죽은 파리들. 이제 최소 전력만 가지고 운전해야 하는데, 이 모든 자동조종장치가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원자로는? 틀림없이 자동 조절장치를 가지고 있을 터. 근데 확실해? 피륵스는 확신할 수 없다. 모든 자동장치를 무시하고 조종실 안에 추한 녹갈색의 큼지막한 파리가 두 마리씩이나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지금 피륵스 앞에서 섹스를 즐기다가 까맣게 타 죽어버렸지 않은가. 진퇴양난, 일촉즉발, 누란의 꼭대기에 선 피륵스. 이걸 어떻게 할꼬? 에잇, 모르겠다. 비상사태 발생이니 이제 남은 건 수동조종만 남았다고 판단한 우리의 주인공 피륵스. 그는 과감하게 조종석의 벨트를 풀고 일어나 수동 조종간을 움켜쥔다. 동시에 환경은 무려 5g 이상으로 치솟는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혀 입술이 터져 유혈낭자한 부상을 입은 피륵스. 그는 끝까지 수동조종간을 잡아 죽기살기로 수동 운전을 이어나가 안정된 상태로 만들어낸다. 성공!

  이제 보고를 해야 하는데, 달 기지에? 아니면 지구의 교장한테?

  이때 눈에 들어오는 또 한 마리의 파리. 그리고 난데없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린다. 등 뒤엔 문이 없는데 갑자기 그게 열리면서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교장. 이게 전부 시뮬레이션이었던 것. 파리도, 파리가 교미를 피복이 벗겨진 전선 위에서 교미를 하는 것도. 합선과 정전과 비상상황까지 모두 다. 교장이 칭찬한다. 피륵스, 잘 했어! 비상상황에서 자동, 즉 컴퓨터 또는 AI를 믿지 않고 수동으로, 인간의 직감과 직관, 그리고 본능적으로 대처해 생존에 성공한 것이 교장의 눈에는 기특했던 거였다. 실제로 매사에 뛰어난 동료 생도라서 피륵스가 아니꼬워했던 모범생 보에르스트는 물을 먹었던 거다.


  어쩐지. 이제야 저 앞에서 교수 불펜이 피륵스한테 한 마디 했던 것이 생각난다.

  “컴퓨터는 인간의 작품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

  “컴퓨터도 고장 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 《우주비행사 피륵스》에서는 정상 상태에서 벗어난 인공지능이 인간과 인간의 구조물을 방해물로 착각하는 일이 몇 번 발생하기도 한다. 완벽을 기하는 프로그래머가 말 그대로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컴퓨터에게 필요 이상의 자료, 모든 자료를 기억하게 만드는 바람에 오히려 인간과 우주선을 파괴하는 경우. 채광을 위해 개발한 노동 로봇이 암괴가 무너져 충격을 받아 인공지능이 오작동해 인간을 살상하는 경우도. 이때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이미 생도시절을 벗어나 관록 붙은 베테랑이 된 영웅 피륵스는 자신의 경험과 입장 바꿔 생각하기로, 물론 조금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만,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8년. 아직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번째 인간의 발자국을 찍기도 전이다. 그럼에도 스타니스와프 렘은 달 기지와 화성 기지까지, 무척 생생하고 과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낭만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실과 과학적 추리와 상상력에 입각한 달과 화성 기지. 읽는 내내 우리나라 작가 복거일의 <파란 달 아래>가 생각났다.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 다른 달 기지, 화성 기지를 만들었을까? 1968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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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18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주비행사 피륵스는 좀 별로였어요. 뭔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좀 뒤죽박죽인 느낌이었는데 책을 읽어내기가 상당히성가셨다는 느낌이에요.
sf를 통해 현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스타니스와프도 진짜 매력적인데 백미는 이욘티히의 우주일지였어요. 최고!!! 이욘티히 읽으시고 꼭 글도 남겨주시고 그러고 쉬세요. 네?????

Falstaff 2025-07-18 15:50   좋아요 0 | URL
옙 다음 렘은 무조건 이욘티히입니다!
저는 천방지축 피륵스가 나이 들면서 연륜이 쌓여 생도시절과 달리 멋진 선장으로 변하는 게 나쁘지 않았는데요. ㅎㅎ 감상이 다 똑같으면 재미 없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