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그리움으로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04
박재삼 지음 / 실천문학사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
책장 저 깊숙한 곳에서 30년 묵은 시집 한 권을 찾았다. 시집 초판이 1996년. 내가 시집을 샀을 때도 1996년. 30대 혈기방장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그때 이 시집을 읽은 특별한 감회 없이 왜 그저 책꽂이에 꽂아두고 그것으로 말았는지 이제 알겠다. 젊은 시절 박재삼의 시집이었다면, 예컨대 <春香이 마음>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의 마지막 연이었어도 그렇지 않았을 듯하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아마 외우고 또 외웠겠지. 하지만 《다시 그리움으로》는 지병인 고혈압, 만성신부전, 위하수, 신경통 등에 시달리던 60대 시절의 박재삼, “사라져버린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 대신 성큼 눈앞에 다가온 것 같은 죽음의 전조를 문득문득 보고 있었던 터. 실제로 그는 이 시집을 내고 다음 해에 64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접고 만다. 그러니 삶을 마감하려는 듯 세상을 정리하기에 몰두한 백조의 노래를 30대 청년이 즐거이 감상할 수는 없었겠지.
이걸 다시 말하면, 이제는 어느새 박재삼보다 오래 살아 더 멀리 가버린 늙어버린 나는 그의 차분한 청산곡曲을 담담하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려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구비구비 굴곡을 겪으며 빠르고 느리게, 잠시 동안은 조금 멈췄다가 드디어 바다에 닿는 강물을 노래한 시인은 이미 길을 마감하는 언저리에 도착했다. 이 노래를 뭐라고 이름할까? 마땅하게 붙일 것이 없었겠지. 그리하여 시인은 無題, “제목 없음”이라 해버렸다.
無題
그대는 태어나기를
그럴 수 없이 예뻤다마는
그 위에
나의 想像力이 加味되어
안 보이게 되어야
더욱 美人으로 나타나는 것이여.
그러나 어쩔꼬,
그대가 이승을 떠났는데로
자주자주
내 앞에만 오는 걸 보니
신통해 못 견디겠는걸.
저승에서나
다시 만날는가 싶지만,
나는 저승이 있다고는
이제는 믿지 않는걸. (전문. P.14)
시집에 <無題>라는 제목의 시가 무려 아홉 편이 들어 있다. 물론 거개가 죽음하고 깊이 연관된다. 무제만큼 시집에 자주 제목으로 등장하는 건 허무虛無. 허무 역시 바로 옆이 죽음 또는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는 깊은 잠의 상태일 것이다. 박재삼은 이렇게, 시조 형식으로 노래했다.
痛恨의 虛無
그 사람 언제 오려나
애터지게 기다려도
죽어 땅 속에 묻혀
영영 모른 체하고
뒷산에
산새 울음만
멍청하게 들리네 (전문. p.34)
그런데 제목은 참 촌스럽다. “통한의 허무.” 이것 말고도 “虛無의 내력”과 “虛無의 갈매기 울음”도 있다. 無題와 虛無에 필적하는 은유지만 이제는 직유가 되어버린 단어 가운데 청산靑山도 있어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아득한 靑山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아
결국 거기에 가서
묻힐 일만 뚜렷이 남았네. (<靑山을 보며> 부분. p.48)
이런 시들은 내가 20대 시절에 읽고 숭앙하던 시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 이 시집을 읽었다면 여태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아득하게 시인의 이름 “박재삼”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유생 시인과 독자 나는 적절하게 연이 맞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청년 시절의 내가 젊은 박재삼을 읽었듯이, 이제 시집을 사놓고 30년이 흘러 나이든 나는 죽음을 한 발짝 앞에 둔 박재삼의 시를 읽는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더 無題.
無題
잠시라도 쉴 때에야
하늘에 구름도 보지
그것을 못 하고
길만 바삐 가다 보면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구름도 숨어버려. (전문. p.16)
시인은 이렇게 살았나 보다. 쉬지도 못하고 길만 바쁘게 가는 바람에 어느새 구름도 숨은 어둔 밤을 향해. 그는 1967년, 서른네 살 때 고혈압이 발병, 1차로 6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진다. 아마도 뇌졸중이었을 듯하다. 누룩 대신 카바이드를 섞어 속성으로 숙성한 막걸리와 불량한 필터가 달리거나 아예 필터조차도 없는 저급한 담배를 마다하지 않던 당시 삼십대들에게 드물지 않은 경우였다. 내 호적등본에도 한 분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저 앞에 인용한 “소리 죽은 가을 江”은 아주 작은 흔적으로만 보인다.
산골물은 졸졸졸
산 속을 누벼 흐르다가
결국은 바다에 들고 만다. (<불변不變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부분. p.44)
이제 그를 한 마디로 하자면, “인생 다 살았다.” 보면 볼수록 인간 삶이란 것의 작음만 눈에 띄는 시인. 그것들이 서로 잘났다고 아웅다웅 하는 것이 마치 아이들 옹알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박재삼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세상을 보느냐고? 아니다. 아직 아니다. 박재삼은 뛰어난 시인이었고, 나는 그냥 한 명 범부일 뿐인 것을.
자연과 인간의 차이 1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
차례차례로 떠서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늘 환히 밝히고 있건만
말 없는 가운데
하나 지치는 일 없네.
그런 가운데
오직 머리가 똑똑하다는 사람만이
너무 변덕이 심해서
늘 옥신각신 잘 싸워
부끄럽기만 하네. (전문. p.30)
이 시집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역시 내가 우러러보는 시인 민영의 발문을 읽는 일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던 민영과 박재삼이 당시 부산에서 이들의 스승인 김상옥의 소개로 만나 이후 오랜 세월 이어간 우정과 일화가 읽을 만하다. 죽도록 부지런히 써도 돈과는 거리가 먼 시 작업을 하는 친구들. 그러면서도 서로의 시업을 독려하고, 돕고, 그리고 더 자주 질투하는 젊은 민영과 젊은 박재삼을 읽는 일. 피싯 옷을 수도 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구나. 세월이 가는 일은 세상이 더 야박해지는 일일 수도 있구나.
이제는 박재삼도 민영도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저승을 믿지 않는다니 두 양반이 넋이나마 만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영혼이라는 것이 만일, 아직도 있는 거라면, 넋이나마 가난하지 않고, 아프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