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김경미는 1959년에 서울애서 출생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오는데, 경기 부천 출생이라는 정보도 봤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자. 한양대 사학과 졸업 후에 고려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수료했단다. 이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 이하 “빗소리와 작약”이라 씀》이 2023년 1월에 나왔으니 세는 나이로 예순다섯, 만 나이로 예순세 살에 냈다. 근데 젊다. 그래서 좋다.

  아주 오래 MBC와 KBS FM의 방송작가로 일한 경력이 독특하다. “별이 빛나는 밤에”. “김미숙의 음악살롱”, “전기현의 음악풍경”, “노래의 날개 위에”, “김미숙의 가족음악”, “윤유선의 가족음악” 등등을 통해 아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거의 한 번 이상 김경미의 언어를 들어봤을 듯하다. 그게 시인 김경미의 말이라는 걸 몰라서 문제지. 시인들이 방송작가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나? 이이는 시집도 여섯 권이나 냈던데.

  이이의 젊은 시. 젊다고 해도 예순세 살 중년 입장에서 젊다는 것이지 새파랗게 젊다는 건 아니다.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전문. P.11)



  정말 시가 재미있지 않나? 나는 읽으면서 키득거렸건만. 이래봬도 왕년에 내가 말이지, 하면서 폼 또는 가오 좀 잡는 듯한 모습.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독자라 시를 읽는다 해서 백프로 다 믿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아니더라도 귀엽지 않나? 이런 거 보면 세상 사는 거 다 비슷하다.

  이게 《빗소리와 작약》에 실린 첫번째 시. 두번째 시에 시집의 제목에 나오는 ‘바다’, ‘빗소리’ 그리고 ‘작약’이 등장하는데 분위기는 바로 앞 페이지 <청춘>과는 사뭇 다르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작가 나름대로 중요한 시어가 나오는 시이니 조금 길더라도 전문을 옮긴다.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전문 p.12~13)



  1연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은 화자 ‘나’일 것이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했다가 괜한 미용사 눈물을 짜낸 사람. 죽음과 눈물, 그것도 내 눈물이 아니라 타인의 눈물까지 불러오는 우울과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시인. 그리하여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어 바다, 빗소리, 작약, 모두 페시미즘 적 분위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바다와 빗소리는 자주 그런 의미의 시어로 사용하지만 약용식물이기도 한 ‘작약’이 같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시어로 등장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아마추어 시 감상자가 생각하기에) 작약이라는 꽃의 꽃말이나, 성분이나, 생김새보다는 ‘작약’을 발음할 때 공명하는 음색이나 분위기, 비록 양성모음으로 만들어졌지만 즐겁게 들리지 않는 발음상 느낌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소리 내 발음해보시라. 작약.

  그런데 이 시의 분위기를 포괄하는 건 역시 바다. 마지막 연에 바다 같은 작약과 빗소리라고 썼다. 작약과 빗소리를 듣고 시인은 바다를 연상하는 수준을 넘어 보는 단계까지 갔다. 시인은 묻는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당신은 아무 답이 없다. 애초에 답을 바라지도 않은 듯하다. 당신한테 답이 오거나 말거나, 소포, 요즘 시대니까 택배가 오거나 말거나 그저 시인은 작약과 빗소리를 보고 있을 뿐. 정말 <청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네.

  나는 시인의 우울에 많이 지쳐 있어서, 우울한 시들만 빼곡한 시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시집 《빗소리와 작약》을 그래도 즐겁게 읽은 이유가 <청춘>과 <취급이라면> 같은 시들이 자주 엇갈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지. 그래서 시인 김택수는 추천사의 앞머리를 이렇게 썼다.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다. 김경미 시는 슬픈 웃음과 유쾌한 외로움이 문장에서 계속 배어 나와 자꾸 곱씹어 읽게 된다.”  (p.141)


  평론가의 전문가 연하는 해설보다 같은 시인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간결하게 하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쉽다. “유쾌한 외로움”의 시를 하나 골라봤다.



  지나치다



  어느 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 초 전

  친구와 절연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이 있으므로

  입과 귀에서 그 친구를 없애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 친구가 내게

  나 또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서로 지나쳤으리라

  멀리 온 정거장처럼 도를 넘어섰으리라


  네가 억울하고 후련하듯

  나도 후련하고 억울하리라


  너는 나 없이도 친구가 많고

  나는 친구 없이도 하늘이 맑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 지나치지 않도록 버스에서

  창밖을 본다

  창 속에 말 없이 앉아 있는 나를 본다


  멋진 밤이다   (전문. p.30~31)



  시를 쭉 읽어 나가면 다 읽는 순간 한 방에 팍 이해가 되는 착한 시. 내가 친구한테 절교를 선언한 건 아니겠지. 절연하고 1초 만에 알았으니까. 뭐 이런 친구도 있지 않나? 나도 무지하게 많다. 근데 이런 식은 아니고 살다 보니까 저절로 조금씩 멀어지다가 점점 그냥 그런 3인칭이 된 친구들. 이렇게 절연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시에서 시인하고 친구는 아닌 모양이다. 서로한테 지나쳤다니까. 얼마나, 어떻게 지나쳤는지도 둘 다 알고 있는 거 같다. 에휴, 이 시를 환갑. 진갑 넘어 썼을 텐데 뭐 그렇게 뾰족하게 살아? 친구하고 절연을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멋진 밤이라니까 뭐. 정말로 멋있고 근사한 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시가 외롭지만 궁상맞지는 않다. 김경미. 재미있는 걸.

  시인이 아무리 오래 시를 써도 역시 시를 쓰는 일은 곤혹스러운 모양이다. 내가 여전히 대학 4학년 기말고사 치르는 꿈을 꾸는 것처럼, 김경미는 시인, 작가 지망생 시절이었을 때를 생각하고 치를 떠는 모양이다. 뭐 숙명이겠지. 그런 시가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렸다. 한 학점이라도 F가 나오면 졸업을 하지 못하는 4학년 기말고사 꿈을 여전히 꾸는 나는 이 시의 작가 지망생의 곤혹스러움을 십분 이해한다고 오해하면서.



  한 겨울밤 11시 59분 작가 지망생의 귀가



  걸을 때마다 귓바퀴가 발밑으로 떨어진다

  코는 깨진 지 오래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된다던 손가락도

  부서진 지 오래


  머리 위론

  몽땅 다 끄고 막고 가린 겨울밤의 검정색들과

  흰 종이같이 눈부신 가로등뿐


  저 흑백의 둘이서 저렇게

  형언할 수 없는

  세상 모든 표현 다 써 대니


  내가 적당한 문장을 쓸 수 없는 것   (전문. P.140)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5-05-29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송작가로 일하며 쓴 방송 “감성” 멘트를 다듬은 엣세이집도 냈더라고요. 그건 이 시집 보단 읽는 재미가 덜 했어요.

Falstaff 2025-05-29 16:49   좋아요 0 | URL
아오 김경미의 팬이시네요! ㅎㅎㅎ 저도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